한(韓)총장에 얽힌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회갑(回甲)때의 일이 그 하나이다. 모교의 학장이던 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韓)총장의 회갑을 축하해 올려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선생의 행선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채 서울을 떠나신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전북 내장사(內藏寺) 호텔에 계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집사람과 함께 축하 케이크를 한 상자 가지고 떠났다. 더운 여름이어서 구슬땀이 흘렀다. 특히, 내장사 진입로는 그때만 해도 포장이 안 되어 있어서 먼지투성이였다. 한(韓)총장은 검소하기 짝이 없는 분이어서 승용차에도 냉방시설을 달지 않았다. 총장차(總長車)가 그러니 학장차(學長車)에 에어컨을 달 수 없는 일이었다. 내장사 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얼굴이 뽀얗게 먼지로 덮여 있었다.
당시에는 내장사 호텔 이외에는 숙박시설(宿泊施設)이 거의 없었다. 호텔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고 총장 사모님이 혼자서 계셨다. 우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시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하신다. 총장께서는 운전사와 함께 근처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러 가셨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가 뵐 수도 없고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진 후에 돌아오셨다. 우리를 보고는 역시 깜짝 놀라신다. 총장께서는 반가워하시는 것이 역력했다. 주위는 적막(寂寞)했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놓고 축하인사를 올렸다. 맥주를 마시면서 밤늦도록 이일 저일을 담소했다. 폐가 될까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운전사가 없이는 올 수 없으니 운전사만 데리고 왔다고 하신다. 낚시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쉬는 날에는 여기저기 다니시는데 기다리게 되는 시간이 길어져서 운전사에게 낚시를 가르쳤더니 대단한 실력가가 되었다는 설명도 하신다. 실제로 운전사는 총장 못지않게 낚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휴일만 되면 낚시터로 모시고 나간다고 들었다.
다음날 백양사(白羊寺)를 거쳐서 귀경하였다. 물론 먼지투성이였다. 천안삼거리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에어컨을 설치하시도록 권유(勸誘)해 봤는데 허사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시지 않는 선생의 인간성(人間性)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믿어진다.
|
|
| ▲ 1974년 한심석 총장의 서울대 졸업식 치사 [동아일보 1974. 2. 26.] |
|
76년 5월 25일, 한(韓)총장께서는 모교의 교수로 복귀하셨다. 총장이 되면 교수직은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신규채용(新規採用)의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교수재임용 제도가 시작되어 상당한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모교의 학장이었던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세상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절실(切實)하게 느꼈다. 교수 임용장을 받으신 선생의 동심(童心)어린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1983년 10월 12일, 한(韓)총장께서는 7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많은 저작(著作)을 남기셨지만 특히 ‘관악(冠岳)을 바라보면서’에서는 선생의 인생철학(人生哲學)을 잘 읽을 수 있다. 10월 14일 영결식(永訣式)이 거행되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조사(弔辭)를 올렸다.
유명(幽明)을 달리하게 된 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슬픈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선생님 영전(靈前)에 몇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화려한 경력에 관해서는 만인이 주지하고 있는 터이어서 새삼스럽게 사족(蛇足)을 붙일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큰 그릇이었던 선생님이시기에 안타까운 심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막아낼 길이 없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우리 의학계(醫學界)나 교육계(敎育界)에서는 물론 겨레의 큰 별이시었기에 더욱 용솟음치는 그리운 감정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이승을 떠나시니 선생님을 모시던 시절의 옛일들이 눈앞에 방불합니다. 해방 후 혼란했던 시절에 의과대학을 건설하는 데 앞장서시던 꿋꿋한 모습, 전시 연합대학시절에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일을 천직(天職)으로 알면 행복하다고 역설(力說)하시던 일, 고된 일과가 끝난 뒤에 오순도순 모여서 약주를 나누면서 후진들을 격려(激勵)해 주시던 모습, 주일마다 저희들을 교회로 인도(引導)하시던 미네소타대학시절의 모습, 연구나 교육에는 전시적 자세(展示的 姿勢)가 적(敵)이라는 점을 역설하시던 일, 낚시의 진미를 알게 되면 사람이 된다고 인생철학을 알려주시던 일, 이제는 모든 것이 옛 일과 옛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선생님! 이승에서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40여 년 동안 서울대학교에 몸 바치신 선생님께서 이룩하신 업적(業績)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내과학을 길러내신 찬란한 공적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오늘의 서울대학교를 구성(構成)하시던 부총장시절, 그리고 몸소 진두지휘(陣頭指揮)하시어 종합캠퍼스를 건설하시고 마침내 관악의 새 캠퍼스로 이전(移轉)하신 총장시절을 생각한다면 선생님이야말로 서울대학교 중흥(中興)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소직(小職)이 의과대학장직을 물려받았을 때 전임학장(前任學長)으로서 의과대학(醫科大學)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간곡하게 타일러 주시던 선생님의 자상하신 목소리가 지금도 저의 귀 언저리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많은 어려운 일들을 수행하시는 총장시절에도 의학교육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을 두시고 지혜(智慧)와 충고(忠告)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입원하신 후에도 대학과 학문에 대한 집념은 조금도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입원실에 찾아가 뵈올 때마다 대학행정 전반에 걸쳐서 격의(隔意)없는 의견(意見)을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평소에 과묵하신 선생님이지만 일단 대학이야기가 시작되면 젊은이 못지않게 정력적(精力的)으로 말씀해 주시곤 하였습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오랫동안 모신 선생님이기에 선생님의 근엄(謹嚴)하시면서도 인자(仁慈)하신 성품(性品)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자처하였습니다마는 뵈올 때마다 대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말씀하실 때는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를 맡고 있는 소직(小職)의 처지에서는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무한한 가치(價値)를 보여주었으며 의사 결정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ㅍ것이 사실입니다.
학자(學者)로서 교육행정가(敎育行政家)로서 선생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국내외에서 존경받는 전문분야의 공적(功績)과 더불어 교육행정가로서의 부동(不動)의 관록은 세인이 숙지하고 있는 바입니다마는 이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선생님의 인간성(人間性)과 인생철학(人生哲學)입니다.
선생님만큼 원만하시면서도 집념이 강하신 어른을 소직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옳다고 작심하시면 반드시 이룩하고 마시는 선생님의 추진력(推進力)은 영구히 높은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건설도 그렇고 선생님의 굽히지 않는 투병정신(鬪病精神)도 그 한 예가 된다고 믿습니다. 속세(俗世)와 타협하실 줄 모르는 선생님의 기개(氣槪)는 만인의 추앙(推仰)을 받을 것입니다. 허영과 과장을 싫어하시던 선생님의 교훈은 우리들 속인에게 한없이 값진 것입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청빈(淸貧)을 신조로 하시던 선생님의 인생철학은 만인의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곁으로 가신 선생님! 이승에 남아 있는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우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국가적인 재난(災難)을 겪었습니다. KAL기 피격 추락사건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랑군 암살폭파사건(暗殺爆破事件)을 당했습니다. 선생님! 이 세상에서 반 문명적, 반 인류적인 테러와 폭력이 영원히 사라지게 해주시옵소서.
약주만 드시면 생전에 꼭 조국통일(祖國統一)이 이룩되도록 하여 그립던 평양을 가보고야 말겠다고 하시던 선생님! 선생님께서 계획하시던 모든 일은 뜻대로 되었습니다만 이 과제(課題)만은 풀지 못하신 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이승에서 다 하시지 못한 이 과제를 남아있는 저희들이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 지도해 주시옵소서.
선생님! 관악(冠岳)을 바라보면서 이룩하신 일들, 그리고 생각하신 일들을 저희들은 언제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유훈(遺訓)은 영원히 저희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하나님 곁에서 고이 잠드소서.
삼가 영전에 명복(冥福)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