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유업을 계승한 서울의대 내과의 김정용(金丁龍) 교수는 서울대학교병원 구내에 간 연구소(肝 硏究所)를 건립하고 현관 옆에 한(韓)총장 동상을 세웠다. 86년 12월 17일 제막식이 있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추모사(追慕辭)를 올렸다.
선생님께선 이 세상을 하직하신 지 어언 3년여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그다지도 사랑하시고 정열을 쏟으시던 내과학(內科學)이나 틈이 나시면 즐기시던 약주는 어찌하고 계신지요.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낚시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오늘 오래간만에 존안(尊顔)을 뵙게 되니 만감(萬感)이 교차하고, 솟아오르는 옛 정을 억제할 길이 없어 두어 마디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서울대학교 교수, 병원장, 학장, 부총장, 총장으로서 계실 동안에 참으로 많은 교훈(敎訓)을 주셨습니다. 이들 교훈은 지금 이 시각에도 훈훈(薰薰)하게 저희들을 감싸주고 있습니다. 그 어려운 총장직을 다하시고 다시 평교수가 되어 모교에 돌아오셨을 때의 명랑하고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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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총장 재임 시 포부를 밝힌 한심석 선생의 인터뷰기사 [경향신문 1970. 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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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서울대학교 총장 취임(總長 就任)을 경하(慶賀)하는 축하연을 옛 교수회관에서 가졌을 때 저는 모교 학장의 입장에서 축사를 올리면서 서울대학교 출신으로는 개교(開校)이래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신 어른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 후 선생님께서는 또 다른 기록(記錄)을 세우셨습니다. 서울대학교 총장직을 연임(連任)하시게 되신 일입니다. 이 일은 전무후무한 사실이며 역사(歷史)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서울대학교의 메인캠퍼스가 관악으로 옮겨간 후 최초의 총장이라는 사실도 특기할 만합니다. 선생님이야말로 종합화(綜合化)된 서울대학교의 아버지이십니다. 선생님께서 뜻하신 대로 서울대학교는 그 웅자(雄姿)를 천하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선생님을 수행해서 여러 곳을 방문했던 일들이 회상(回想)됩니다.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주일(主日)만 되면 저를 데리고 교회에 가셨지요. 그리고 으레 맥줏집에 들러서 한 잔 주셨지요. 얼굴이 붉어지는 저를 보시고 술 좀 배우라고 조언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것은 후배(後輩)에게 절대로 약주 값이나 식대(食代)를 치르지 못하게 하신 일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신세를 끼쳤는데도 신세를 갚을 기회(機會)를 한 번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국내에서 여행하실 때에도 이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젊은 사람 뺨치는 기력(氣力)에 탄복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불국사(佛國寺)호텔에서 석굴암(石窟庵)에 오를 때 따라오지 못한다고 흉보시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과 달라서 캄캄한 새벽길을 도보(徒步)로 오를 때의 일이었지요.
선생님께서 남기신 에피소드는 한없이 많습니다. 하나하나가 음미(吟味)할만한 소중한 것들입니다. 진리(眞理)가 담겨있고 고귀한 인간성(人間性)이 숨어있습니다. 선생님을 모시는 동안에 저는 호되게 두 번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렇게도 인자하시고 어지신 선생님이신데 후배(後輩)를 지도하시는 데는 조그마한 사심(私心)도 허용치 않으셨지요. 요사이도 가끔 선생님의 꾸지람을 되새겨 보면서 선생님께서 위대하셨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불세출(不世出)의 학자이시고 교육자이시며 행정가이시던 선생님께서 병마(病魔)를 물리치기 위하여 투쟁하시던 모습이 저희들에게는 너무나 애처롭고 안타까웠습니다. 투병(鬪病) 중에도 학교일에 관하여 그렇게도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던 선생님이야말로 도저히 남이 따를 수 없는 경지(境地)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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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필 총리가 연임 발령된 한심석 서울대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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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동심(童心)을 간직하는 일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이 신념을 생활화(生活化)하신 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언제나 아름다운 동심(童心)을 간직하고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쉽지만 이러한 인생철학이 실천에 옮겨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는 남모르는 의지와 노력이 전제(前提)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선생님께서 대한민국 학술원상(學術院賞)을 수상(受賞)하신 후 원로 선배님들을 모시고 자축하시던 모임이 문득 생각납니다. 어지간히 축하연(祝賀宴)이 진행되었는데 무엇이 발단이 되었는지 대선배님 두 분 사이에서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모이신 선배님들은 윤일선(尹日善) 선생, 이병도(李丙燾) 선생, 이희승(李熙昇) 선생, 김두종(金斗鍾) 선생, 박동길(朴東吉) 선생 등이었습니다. 한 살 덜먹은 사람이 건방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꼭 유치원 아이들의 싸움과 같았습니다. 옆에서 듣고 계시던 선생님께서 “아직도 동심(童心)을 잃지 않고 계시군”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님! 이 세상을 떠나신 후 선생님께서 몸 바치시던 학문(學問)은 중단 없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지도 아끼시던 제자들은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실력을 발휘해서 선생님의 뜻을 십분 받들고 있습니다.
다시 선생님의 존안을 뵙게 되어 살아계신 선생님을 만나 뵙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永遠)히 저희들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저희들의 수호신(守護神)으로서 종전과 다름없이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고 밀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선생님을 적극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동상 제막식에 즈음하여 삼가 명복(冥福)을 빌면서 한 말씀 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