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4월에 대학 예과에 입학한 후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저녁때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 경성제대 예과(京城帝大 豫科)는 청량리(淸凉里)에 있었고, 학교 뒤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다. 지금은 야산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민가를 보기 힘들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경기중학교 졸업생의 모임인 일우회(一友會)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경기중학교의 전신이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였는데 ‘일우회(一友會)’라는 명칭은 이 교명에 연유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갈을 받은 대로 야산 한 구석의 조용한 언덕바지로 갔다. 이미 상당수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일우회의 회원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당시 성대예과의 한국인 학생 중에서 경기중학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약 70명이 모였던 것으로 회상된다. 일우회의 신입생 환영회가 시작되었다. 5월 초의 신록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분이 사회를 했는지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강처용(康處溶) 형이 연설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강(康)형은 중학교와 예과의 1년 선배였다. 유창한 화술을 구사하면서 인생철학(人生哲學)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참으로 멋있는 내용이었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이 자리에 있는가, 등에 관하여 외국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태무하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이 깊었는지도 모른다. 1년 밖에 연장(年長)이 아닌데 저렇듯 잘 해낼 수 있는가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대체로 그의 말은 낭만주의(浪漫主義)에 바탕을 두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의 낭만을 이야기하는 그에게 무던히 호감이 갔었다. 순진한 나에게 그의 연설은 많은 자극을 주었다.
강(康)형은 신입생들에게 주는 선배의 주문이라면서 예과시절에 세 가지는 꼭 해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첫째는 외국어(外國語), 둘째는 스포츠, 셋째는 연애(戀愛)가 그 내용이다. 영어든 독일어든 간에 한 가지 외국어에 반드시 숙달해야 하며 한 가지 운동은 꼭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으면 연애를 해도 좋다는 충고였다.
그의 이야기는 그럴 듯했고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였던 대부분의 신입생들이 같은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학과 스포츠는 변함없는 과제이다. 예과 시절에 이런 것들을 해내지 못하면 영원히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만다고 위협적으로 말하던 그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처음 1년 동안은 강(康)형이 무던히 높은 고지(高地)에 위치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2학년으로 진급한 날의 일이다. 우리 강의실로 찾아온 강(康)형이 시간이 다되었는데도 좀처럼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 나는 학급 대표였다.
“강(康)형,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보시지요”라고 했더니, “이 사람아, 무엇이 그렇게 급해! 인생은 긴거야” 하고 태연하게 앉아 있다. 낙제를 한 것이다. 나와 급우가 된 것이다. 어제까지도 대단한 선배로 생각했던 강(康)형이 급우가 되고 보니 야릇한 심정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강(康)형과는 새로운 차원에서 교제가 시작되었다. 확실히 특징이 있는 인사였다.
그의 인생철학은 여전했다. 무던히 많은 책을 읽었다고 느껴졌으며 사실상 박식하였다. 독서(讀書) 때문에 낙제했다는 것이 그의 변이었다. 낭만주의에서 때로는 감상주의(感傷主義)로 흘렀던 그의 사고방식이 당시의 일부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만연했던 것이라고 회상되기도 한다. 6·25후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생사를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명백한 의문은 그와 같은 낭만주의자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어찌 적응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예과생활 중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취미생활(趣味生活)을 해보라는 것이 여러 선배들의 부탁이었다. 선배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취미생활에 있어서 빈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굳이 말한다면 취미의 하나로 영화감상을 들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감상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보통학교나 중학교에서는 영화(映畵)구경을 불허(不許)했으며 들킬 경우에는 처벌을 받게 돼있었다. 그랬었건만 나는 보통학교 때부터 남몰래 영화를 구경하곤 했다. 영화관에 가면 영화를 소개하는 ‘팸플릿’이나 설명서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들을 수집하는 것이 하나의 취미였다. 상당히 많은 양을 수집했는데, 6·25동란 때 송두리째 없어졌다. 생각만 해도 아깝기 한이 없다.
예과에 입학하니 영화관 출입은 합법적이다. 그렇다고 빈번하게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학업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의 일인 것은 물론이다. 선배들과도 가끔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분도 있었다. 선배들의 공통된 조언은 양화(洋畵)를 볼 경우에는 자막을 보지 말고 원어(原語)발음을 들으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어학 면에서 도움이 된다는 지적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영화이지만 근래에는 약 10년 동안 영화관에 가 본 일이 없다. 그래도 과거에는 영화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요사이는 전연 거리가 멀어졌다.
예과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만돌린’부에 가입했다. 악기 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것이 ‘만돌린’이다. 원래 음악에 소질이 없었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만돌린’이라고 들었기에 뜻을 둔 것이다. 약 3개월 동안 열심히 연습했다. 그런데 하루는 ‘만돌린’부장이라는 선배가 이야기 좀 하자고 한다. “자네 때문에 만돌린 부가 발전이 늦네” 한다. 나 때문에 ‘만돌린’부가 피해를 받으니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잘 알았습니다. 오늘부터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이런 선배를 미워하지는 말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