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동기로 신현확(申鉉碻) 선배를 알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신(申)선배는 나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 중의 한분이다. 1976년 4월부터 2년간 서울대학교(大學校) 보건대학원장직(保健大學院長職)을 맡았다. 이 기간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의 하나가 소위 CMB의 대충기금(大充基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CMB 즉, China Medical Board는 원래 북경 협화의과대학(北京 協和醫科大學 : Union Medical College)을 지원하기 위하여 Rockfelor 재단(財團)에서 독립한 재단이다.
일본의 침공(侵攻)으로 이 대학이 폐쇄되었고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지원대상교(支援對象校)가 한국을 비롯한 16개국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도쿄대학(東京大學)을 위시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의 대학이 이 재단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지원을 받은 대학으로는 서울의대(醫大)와 연세의대(延世醫大)가 있다. 양교(兩校) 이외에도 고려대, 경북대 등이 있었지만, 지원 기간이 짧았는데 서울의대와 연세의대는 오랫동안 혜택을 받았다.
CMB의 대충기금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학교 측에서 25만 불에 해당되는 1억 2천여 만 원을 준비하면 CMB 측에서 25만 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50만 불에 해당되는 연구기금(硏究基金)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보건대학원의 경우는 아무리 궁리해 봐도 이 막대한 금액의 원화가 나올 길이 없다. 의과대학(醫科大學)에서는 교직원은 물론, 동창회에 부탁해서 이 돈이 마련될 수 있었지만, 보건대학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우선 교직원으로부터의 모금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액수는 미미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끝에 문교부에 가서 호소를 해봤지만 무위(無爲)하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당시 보건사회부장관이시던 신현확(申鉉碻) 선배를 방문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나는 문교부장관이 아니라 보사부장관인데 왜 나에게 왔느냐”고 하신다. 당연한 이야기다. 오죽하면 보사부장관에게 왔겠느냐고 했더니, 잠시 생각하시던 끝에 경제기획원 모 인사에게 전화(電話)를 하신다. 검토해 보겠다는 답변인 것 같았다. 기다려 보라는 언질을 받고 장관실을 나왔다.
그 후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좌우간 성사(成事)되었다. 즉, 이 금액을 받게 된 것이다. 생각할수록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보건대학원에 50만 불 연구기금이 마련된 이면에는 신(申)선배의 후의(厚誼)가 절대적이었다.
보건대학원장직을 물러나고 한 달 후인 1979년 5월에 서울대학교 병원장에 취임(就任)하였다. 임상(臨床)을 모르는 사람이 병원장(病院長)이 되는 것이니 걱정도 많았지만, 명에 의해서 이 직을 맡았다. 맡고 보니 병원행정(病院行政)이 그야말로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께서 이 병원에 대하여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근심이 앞섰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병원 건물을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자금(資金)과 병원 운영에 필요한 인력(人力), 그 중에서도 교수의 증원문제(增員問題)였다. 전자는 박찬현(朴瓚鉉) 문교부장관을 뵙고 해결이 되었는데, 후자는 만만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부총리이시던 신(申)선배를 찾아뵙고 말씀 올렸다. 80명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원래는 서울대학본부와 문교부를 통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가지고는 성사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선배께서는 이야기를 경청(傾聽)하시더니 노력해 보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말이 쉽지 80명이란 숫자는 웬만한 대학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숫자와 맞먹는다. 말씀을 올려놓고도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일도 성사(成事)된 것이다. 연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낙착(落着)이 된 것이다. 인력문제도 그랬지만 대학병원의 건축 예산 문제도 신(申)선배가 아니었으면 마무리될 수 없었다고 후에 들었다. 박(朴)대통령이 더 이상 병원을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고집하신 데 대하여 신(申)선배께서는 조금만 더 투자하면 될 것을 여기서 끊어버리게 되면 이제까지의 투자가 무색해진다고 몇 번이고 상신하여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공적(公的)인 일로 신세를 많이 졌는데, 이번에는 사적(私的)인 일로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어서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경험도 하였다. 우리 동기생의 한 사람인 김기홍(金箕洪)형의 일이었다. 김(金)형의 아드님이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실패를 했다. 은행과의 관계 등 복잡한 내용이어서 나로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신(申)선배께서 배려해주시면 이 일이 풀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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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년 보건대학원장 시절 병원관리연수과정을 개최하고 / 앞줄 중간에 윤천주 총장, 신현확 보사부장관, 한격부 의협회장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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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일도 아니고 사적인 일로 괴롭힐 생각을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묘수(妙手)를 찾는 길을 강구하였다. 예과 때부터 막역한 친구인 성수현(成守賢)형의 아드님이 신(申)선배님의 사위였다. 즉 신(申)선배와 성(成)형이 사돈관계에 있는 처지였다. 성(成)형은 거창(居昌)의 명문 출신이며 오랫동안 고향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유수(有數)한 의료인이다. 두 분 자녀의 결혼식 때 내가 주례를 맡았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는 되어 있었다.
성(成)형과 이야기를 맞추었다. 어느 날이었는지 확실한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당시 국무총리이시던 신(申)선배께서 삼청동(三淸洞) 공관으로 몇 분을 초대하신 일이 있었다. 성(成)형과 나도 초청 대상이었다. 만찬이 끝난 후에 신(申)선배에게 사정 말씀을 올렸다. 내용을 잘 모르는 처지였기 때문에 김기홍(金箕洪)형이 적어 준 메모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이 일도 잘 풀린 것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공적인 일이건 사적인 일이건 간에 이렇게 도움을 주기는 힘든 일이다.
생각해 보면 신(申)선배께서 장관, 부총리, 총리를 역임하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도움을 받은 것이다. 지금도 이 어른 앞에서는 머리가 올라가지 않는다. 훨씬 전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성수현(成守賢)형과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었는데 이상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오고가곤 했다. 김(金)형의 안부를 물으시기도 하였다.
신(申)선배는 공직을 물러난 후에도 여러 가지 일을 맡고 계신다. 83년부터 86년까지 한 ․ 일 협력위원회(韓 ․ 日 協力委員會) 회장으로서 활약하셨고, 86년부터는 삼성물산(三星物産)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계신다. 6공화국 출범 후에는 행정개혁위원회(行政改革委員會) 위원장으로서 존재를 과시하시기도 하였다. 1989년 11월에 삼성복지재단(三星福祉財團)이 발족되어 나도 이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신(申)선배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 재단은 고 이병철(故 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의 유산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탁아소 운영, 소년소녀 가장(家長)에 대한 보조 등 사회사업과 더불어 호암상(湖巖賞) 시상 등 굵직한 일을 하고 있다. 호암상은 과학기술상, 의학상, 언론상, 사회봉사상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사회의 초대 이사진용은 이건희(李建熙) 이사장을 비롯하여 신현확(申賢碻), 민복기(閔復基), 김상협(金相浹), 이현재(李賢宰), 조우동(趙友同), 김옥렬(金玉烈) 제씨와 본인이다.
한편 신(申)선배는 전직행정수반협의회(前職行政首班協議會, Inter Action Council) 멤버로서 많은 일을 하고 계신다. IAC는 세계 각국의 전직행정부반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전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상호 관심사와 제반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1983년에 결성된 모임이다. 전직 대통령이나 수상 31명이 정회원인데, 독일의 슈미트(Helmut Schmidt) 전 수상이 회장이고 일본의 후쿠다(福田) 전 수상이 명예회장이다. 신(申)선배는 85년부터 준회원으로 계시다가 88년에 정회원이 되었다.
제8차 총회가 1990년 5월 23일부터 5월 26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는데 신(申)선배가 서울대회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신 일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90년대 아시아지역의 정치발전, 현재 유럽에서의 발전 및 타 지역에의 영향, 금융시장의 국제화 및 잠재적 위험, 개발 ․ 인구 ․ 환경문제 등이 토의되어 많은 성과를 얻었다. 참석자(參席者) 중에는 서독의 슈미트 전 수상, 일본의 후쿠다 전 수상,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Valery Giscard d'Estaing) 전 대통령, 캐나다의 트루도(Pierre Elliot Trudeau) 전 수상 등 20여명의 정회원 외에 소련의 도브리닌(Anatolyi F.Dobrynin) 대통령 고문, 미국의 맥나마라(Robert McNamara) 전 국방장관을 비롯한 다수의 저명인사들이 있었다.
IAC에 관하여는 신(申)선배로부터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평소에 듣고 있었는데 막상 서울에서의 활동상을 보니 과연 훌륭하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든 이런 모임이 서울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일이며 그만큼 신(申)선배의 존재가 돋보이기도 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에도 가끔 신(申)선배를 찾아뵙곤 한다. 그럴 때마다 선배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신(申)선배의 말씀이 나에게는 대단히 유익할 때가 많다. 6공화국이 북방정책(北方政策)에 힘을 기울일 무렵 신(申)선배는 여러 차례 소련을 방문하면서 뒷바라지를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로는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방소(訪蘇)하시기도 하였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으로 한 ․ 소관계가 친밀해졌는데, 여기에는 신(申)선배의 공이 크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좋은데, ‘know how'를 모르는 소련 지도층이 걱정스럽다고 하신 신(申)선배의 뜻을 나는 잘 이해하고 있다.
90년 9월, 큰 화재(火災)가 있었을 때 나는 인사차 신(申)선배를 찾아갔다. 반갑게 맞이해 준 신(申)선배는 언제나와 같이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신다. 북방정책(北方政策)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김(金)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김(金)형은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 생존 시에 고통을 드린 아드님이 훌륭하게 성공해서 부친의 넋을 위로해 올리게 되었다고 말씀 올리니 대단히 기뻐하신다. 어려웠을 때 도와주신 신(申)선배의 후의에 재삼 감사한다고 했더니 흐뭇해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