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李賢宰) 총리 (150회)

나의 생애에서 이(李)총리는 가장 친근하고 영향력 있는 벗이며 후원자이다. 23년생이니 나보다 6년 연하이고 후배이지만 어느 모로 보거나 나에게는 훌륭한 조언자이다. 이(李)총리와 나와의 관계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서울대학교 학생처장(學生處長)이던 때 나는 대학원의 교무과장을 거쳐 의대학장으로 근무하였다. 보직관계로 이래저래 서로 만날 기회가 적지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그의 인간성과 지혜에 감명을 받았다. 우선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데에 탄복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양반이란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전공분야에 관하여는 내 자신이 비판할 만한 입장이 못 되지만 어쨌든 그의 학문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경제학 특히 재정경제학(財政經濟學)의 권위자로서 일찌감치 존재를 과시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라는 것은 전공분야가 아니라 일상생활, 특히 학원생활에서의 지혜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타내는 그의 지혜는 참으로 비범하였다.

이(李)총리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김성진(金晟鎭) 선생의 서랑이라는 사실이다. 김(金)선생님께서는 “현재(賢宰)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김(金)선생님께서 이(李)총리에게 쏟으신 애정은 대단하였지만 이(李)총리 역시 선생님 못지않게 선생님께 효를 다하였다.

공적으로 이(李)총리와 내가 맺어진 것은 서울대학교 총장시절이다. 80년에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한 나는 당시 사회과학대 학장이던 이(李)교수에게 부총장으로 함께 일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학본부 주위의 사정에 정통하고 인문사회분야의 인사를 생각하다 보니 이(李)교수가 가장 적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李)총리와 나는 총장과 부총장의 관계로 시작하였다. 부총장으로서의 이(李)교수는 참으로 꼼꼼하게 학사를 처리하였다. 학사행정(學事行政)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총장이 곤혹을 당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李)부총장은 총장을 대신하여 비판을 받으면서 나를 감싸주었다. 실제로 나의 총장시절에 궂은일은 그가 도맡아서 해결하였다.

내가 문교부로 자리를 옮긴 후 제일 먼저 착수한 인사는 이(李)부총장을 총장으로 임명하는 일이었다. 임명권자인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나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李)부총장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어려운 때였지만 학사행정 능력과 해박한 지식은 서울대학교를 잘 끌어 나갔다.

내가 문교부장관으로 재직 중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동향은 곧 우리나라 학원문제를 대표하는 것 같았다. 이(李)총장이 취임한 후 나는 새삼스럽게 든든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李)총장과 나는 서로 믿고 이해하며 존경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문교부에서 물러난 후 이(李)총장 주위의 사정도 점차로 달라지기 시작한 것으로 느껴졌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이(李)총장의 마음은 대단한 바가 있었다. 총장은 학생 징계문제(懲戒問題)에 수시로 부닥치게 되는데 이(李)총장은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리하여 결국 이(李)총장은 그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나는 문교부에서 물러난 후 한국교원대학교 총장으로 근무하였는데 그때도 이(李)총장과는 수시로 연락하고 만나고 하였다. 이(李)총장이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나는 많은 사회경험을 하였다. 이(李)총장이나 내 자신이 바라는 것은 서울대학교 교수로 이(李)총장이 복귀하는 것이었는데 이 일이 마음과 같이 되지 않았다. 내가 알만한 분에게는 되풀이하여 진정했는데도 풀리지 않았고 이(李)총장은 거의 1년간은 허송하였다.

▲ 서울대 학도호국단 이임기념에서 / 앞줄 왼쪽부터 석희갑 사무국장, 이현재 부총장, 나, 조용섭 학생처장, 어창수 시설국장 (1982. 2. 20.)

청렴하기 그지없는 이(李)총리의 생활이 걱정이 된 나는 서울대를 포기하고 사립대학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사실 몇몇 사립대(私立大)에서는 이(李)총장을 탐내기도 하였고 어떤 대학에서는 요직을 마련하겠다고 하기도 하였다. 조금만 더 참아보겠다고 하던 이(李)총장에게 서울대학교 교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

평교수로서 학교생활을 즐기던 이(李)총장에게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6 ․ 29 선언을 바탕으로 제6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자 노태우(盧泰愚) 대통령은 이(李)총장을 초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지명한 것이다. 대통령과 함께 내각에 참여하였던 이(李)총리는 나에게 보건사회부장관직을 마련하여 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나는 임기만료 6개월을 앞두고 한국교원대학교 총장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88년 2월 25일 노태우(盧泰愚)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고 곧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임명장을 받기 전 약 2주일 동안 국무위원 내정자들은 삼청동 소재 금융 연수원(金融硏修院)에 매일 아침 출두하는 것이 일과였다. 국무위원들은 이(李)총리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예의를 지켰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였다. 종래에 특수한 관계에 사로잡혀 있었던 때문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인가 나는 이(李)총리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상사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된 것이다. 껄껄 웃으면서 아무러면 어떠냐고 하던 이(李)총리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이(李)총리에게 예를 지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을 하였다. 국무회의 등 공개석상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함구하기로 하였다. 이(李)총리는 이(李)총리대로 사석에서는 깍듯이 나에게 예를 지켰다.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자리를 내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李)총리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지 않을까 하고 조심하였다. 이(李)총리와 나와의 관계는 6공 초대 내각시절에도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6공 초대 내각은 비교적 단명이었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시작되었으며 그만큼 정부의 입장은 어려웠다. 이(李)총리는 그 어려운 때에 무던히 많은 수고를 하였다. 국회에서 대학교수식으로 설명하면서 답변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초대 내각에서 물러난 후 이(李)총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韓國精神文化院長)에 취임하는 한편, 대통령 자문기관인 교육정책심의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어 눈부신 활약을 계속하고 있다. 학식과 관록, 그리고 덕망을 지닌 그는 많은 인사들이 존경하는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나는 초대 내각에서 물러난 후 주식회사 녹십자회장, 환경처장관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민국학술원회장, 녹십자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이(李)총리와의 교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없다.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두 사람에 박태원(朴泰源) 인하대학교명예총장, 조성옥(趙成鈺) 전 문교부차관 등이 자리를 같이 하고 구회를 나누기도 한다.

6공화국 초대 내각의 진용으로 구성된 6초회(初會)는 이(李)총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거의 매월 모임을 갖고 있다. 골프 모임으로 되는 경우도 많은데, 골프를 치지 않는 이(李)총리는 경기 후 식사 때에는 반드시 참석하여 회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李)총리는 효자로서도 이름이 높다. 실제로 노모를 모시는 그의 정성과 효심은 대단하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노모를 모시기 위해 할애하는 시간은 아끼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나라의 재상(宰相)을 지냈지만 자당어른의 말씀을 어겨본 일이 없다고 전해 듣고 있다.

이(李)총리는 전공분야 외에도 한학에 조예가 깊다. 한학에 대하여는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문장력(文章力) 구사에 있어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식사, 기념사, 축사 등 수없이 많은 것을 마련해 왔는데, 그는 한 번도 이들을 소홀하게 다룬 적이 없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그의 능력과 성의를 엿볼 수 있다.

이(李)총리는 천재적인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기억력을 발휘하는데 특히 개개인에 관한 기억력은 대단하다. 성명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력까지도 샅샅이 기억하고 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타고난 자질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고 이(李)총리와 상의하고 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준 후원자라고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