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후 미국의 China Medical Board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의과대학을 지원했는데 주요사업의 하나가 미국으로 교수들을 파견하여 연수를 받도록 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아시아 여러 나라 의과대학에서 많은 수의 교수들이 C. M. B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값진 경험들을 하였다.
오랫동안 C. M. B회장으로 일하던 맥코이(Oliver R. McCoy) 박사 후임으로 옹글리(Patrick A. Ongley) 박사가 취임하였는데, Ongley박사는 미국으로 파견할 것이 아니라 서로 사정이 비슷한 아시아 국가 사이에서 교수를 교환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그 실천방안을 모색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나는 보건대학원장이던 박형종(朴亨鍾) 교수, 의대 교무과장이던 김용일(金勇一) 교수, 보건대학원 교무과장이던 노인규(盧忍圭) 교수와 한 팀이 되어 74년 7월 25일부터 8월 17일까지 동남아시아 몇 나라의 보건의료시설과 파견 수련지를 답사한다는 명목으로 타이베이,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 자카르타 등을 방문하고 8월 14일에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8월 15일이 공휴일이 아니었다. 아침 10시 동경(東京)대학 의학부장실에 가서 다카야스(高安久雄) 의학부장과 공중위생학 교수인 카츠누마(勝沼晴夫) 박사 등과 환담을 나눈 후 위층에 자리한 의학박물관(醫學博物館)을 관람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 다카야스(高安) 의학부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귀국에서 저격사건이 발생한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대통령이나 고위층이 저격당했다면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시지 않겠느냐 해서 알린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며 어디서 들은 이야기냐고 물었더니, 사무장(事務長)이 라디오를 통하여 들었는데 끝머리 부분만을 들었기 때문에 잘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일정을 중단하고 숙소인 뉴저팬호텔로 돌아갔다. 아무리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도 이에 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연락을 취할 만한 곳에는 전부 취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 날은 항공편이 없었다. 다음날 제일 빠른 편으로 귀국하기로 하였다. 저녁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에서도 언급이 없었다. 겨우 서울과 연락이 되었는데, 대통령(大統領)께서는 무사하시고 영부인(令夫人)께서 서거하셨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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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일어난 1974년 11월 의학교육세미나에서 / 왼쪽부터 김홍기 병원장, 이귀향 간호과장, 두 사람 건너 한심석 총장, E.B 브라운 교수, 나(학장), 일리아스 WHO파견관, 신동훈 교수, 고광욱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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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귀국하였다. 김포(金浦)공항으로 마중 나온 집사람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15일 아침 평소 가까이 지내오던 농대 전 학장 표현구(表鉉九) 박사의 사모님과 서울대병원 시계탑(時計塔)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표(表)박사의 자부(子婦)되는 분의 출산문제로 산부인과의 김승욱(金勝煜) 교수를 방문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생이던 둘째 딸 성택(星澤)과 함께 병원으로 와 시계탑 앞에서 하차하여 기다리고 있던 표(表)교수 부인과 그의 자부를 만나고 이들을 김(金)교수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 시계탑 문을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한다(소개가 끝나면 집사람은 성택(星澤)이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성택(星澤)이가 혼자 차에 남아 국립극장에서 진행 중이던 8․15 기념행사의 중계방송을 듣고 있으려니까 탕탕하는 총소리가 들리더니 저격당한 것 같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란 성택(星澤)이가 차에서 뛰쳐나와 집사람에게 달려가서 대통령이 저격당한 것 같다고 알렸다. 말을 듣자 집사람은 머리에 와 닿는 것이 있어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당장 김진복(金鎭福) 교수와 김승욱(金勝煜) 교수에게 연락하여 응급실로 가시게 하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고 한다. 조금 전에 시계탑에서 우연히 김진복(金鎭福) 교수와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으며, 김승욱(金勝煜) 교수와는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선생은 틀림없이 원내에 계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한심석(韓沁錫) 총장과 김홍기(金弘基) 원장에게도 연락을 올리도록 했다. 그리고는 응급실로 직행하였는데 응급실에서는 김진복(金鎭福) 교수가 계시더라고 했다. 김(金)교수는 환자 관계로 그날 응급실에서 일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金)교수에게 모르기는 하지만 대통령께서 오실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병원 건물 모퉁이에 서서 혹시나 하고 차를 기다렸다.
그 당시 응급실의 위치는 현재의 응급실과는 반대쪽에 있었다. 덜컥 겁이 나더라고 했다. ‘메디컬센터’로 가실 수도 있고 미군 121병원으로 가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으니까 검은색 세단 3대가 병원정문으로 들어오더니 시계탑 분수대 쪽으로 질주하더란다. 맨 앞차 앞좌석에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이 보이고 뒷좌석에는 누군가가 육영수(陸英修) 여사를 안고 있었다 한다. 김(金)실장과 집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집사람은 도로로 뛰어 가서 분수대를 돌고 이쪽으로 오라고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지르면서 손짓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응급실로 가는 길을 알렸다 한다.
심보성(沈輔星) 교수와 김정용(金丁龍) 교수가 뉴스를 듣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집사람은 응급실에서 나오는 김정용(金丁龍) 교수에게 상황을 물었더니, 이미 일은 끝났다고 대답했다 한다.
그날 저녁 신문사로부터 문의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그런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 성함이 뭐냐는 등등의 질문을 받았는데, 자신은 기관장의 아내인데 남편이 출장 중이어서 만의 하나라도 잘못이 생기면 문제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성명도 알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