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근(金正根) 형의 실종(失踪)...

김정근(金正根) 형과 내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즉 중학과 대학의 동기생일 뿐만 아닐, 6촌동서 사이이다. 김(金)형이 나에게는 결혼 중매인이기도 하다.

김(金)형은 공군에서 군의관 복무를 마친 후 도미하여 신경외과를 정식으로 연구하고 명실 공히 신경외과의 대가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부인 정기순(鄭冀順) 여사가 심장 질환을 앓게 되어 김(金)형이 근무하던 미국 뉴햄프셔주 하노바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내가 미네소타대학에서 공부하던 1955년 겨울에 미니애폴리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하노바를 찾아갔다.

도중의 설경(雪景)이 지금도 회상된다. 마침 크리스마스 계절이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수술을 받고 얼마 되지 않은 후였지만 예상 외로 건강해 보였던 기순(冀順) 여사의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김(金)형 내외는 지극히 행복해 보였다.

수년 후에 기순(冀順)여사는 세상을 떠났다. 미국생활 10년을 마치고 김(金)형은 귀국하였다. 이화여대, 고려대, 연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안국동에서 문태준(文太俊) 박사와 함께 개업하기도 하였다. 치매증이 심하게 되기 전에는 거제도 옥포(玉浦)에 소재한 옥포(玉浦)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아주대학 총장인 김효규(金孝圭) 박사의 배려가 있었다고 듣고 있다.

▲ 미국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1956.) / 김정근 형이 근무했던 미국 뉴햄프셔주 하노바 병원을 찾았을 무렵이다.

상배한 후 13년 만에 재혼하여 삼청동(三淸洞)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본부인이 작고한 후에는 자연히 가족적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기생으로서의 우정은 변할 리가 없다. 만나게 되면 옛이야기를 하면서 회상에 젖곤 하였다. 봄․ 겨울 두 차례 대학 동기동창회(同期同窓會)가 있는데 겨울모임은 부부동반이었다. 김(金)형은 부부동반인 경우에만 출석하였다. 건망증이 심해서 부인이 인도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김(金)형의 치매증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92년 8월 14일 중학 동기생인 박상우(朴相雨) 학형이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를 방문하였다. 박(朴)형은 일본 우라와(浦和) 고등학교를 거쳐 동경(東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학병(學兵)으로 끌려갔으며 후에 영남대학교수로 봉직한 바 있었는데, 근년에는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빈소에는 중학 동기생인 유병덕(兪炳德) 형과 신웅호(申雄浩) 형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유(兪)형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김정근(金正根)형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다그쳐 물으니 임대순(任大淳) 형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빈소에서 돌아오자마자 임(任)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任)형은 전후사정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임(任)형은 김(金)형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동기생이다. 사실 임(任)형은 동기생 한 사람 한 사람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또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김(金)형이 실종되기 2개월 전까지는 빈번하게 만나서 시중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치매증이 점점 심해져서 실종되기 전 2개월 동안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고, 임(任)형도 더 이상 도울 수 없어 만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김(金)형 부인은 그 동안 파출부 내외분을 고용하여 김(金)형을 돌보게 하였다고 한다.

김(金)형이 가출한 지 1주가 지나서 소식을 들은 셈인데 그때까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김(金)형은 명문거족(名門巨族)의 9남매 중 막내였다. 넷째 형인 김형근(金亨根)씨는 자유당 시절에 내무장관을 지냈고, 그의 아들인 유후(有厚)씨는 명검사로 칭송이 자자했으며 김(金)형이 실종되었을 당시에는 청와대 사정(司正)수석비서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또한 맏형인 명근(命根)씨의 아드님 응준(應埈)씨는 서울시 부시장직을 지냈으며 시우회(市友會, 서울시 전직 직원들의 모임) 회장으로서 양로원이나 고아원 등을 잘 알고 계신 분이었다. 모든 힘을 다하여 수색작전을 폈으나, 소득이 없었다. 신문에 광고도 내고 지하철 정거장에 사진을 붙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김(金)형을 봤다는 전화는 쉴 새 없이 걸려왔다고 한다.

8월 12일 밤 9시가 지나서 귀가했더니, 집사람이 의외의 소식을 들려준다. 김(金)형을 조치원(鳥致院) 제일병원(第一病院)에서 찾아 서울대병원으로 데려왔는데 응급실로 옮겨지기 직전에 운명했다고 한다. 곧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아직 빈소가 마련되기 전이었다.

누구도 확실한 것은 알 길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줄거리의 이야기가 그래도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충남 서천(忠南舒川)의 병원에 입원중인 부친을 문병하기 위하여 내려가 보았더니 자기 부친 옆자리에 누워 있는 환자가 좀 특이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기골이 귀족풍이어서 이런 병원에 입원할 사람은 아닌듯한 데다가 링거를 주사해도 주사기를 빼내곤 하여 이상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 후 한 달쯤 지나서 어느 지하철역 벽에 붙어있는 사진을 보았더니 바로 그 사진이 그 환자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곧 전화를 걸어서 한 달쯤 전의 일이어서 아직 병원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부인과 천주교 신자 한 분이 곧 서천병원(舒川病院)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조치원(鳥致院) 제일병원으로 옮겨간 후였다. 다시 조치원 제일병원으로 갔더니 피골이 상접한 김(金)형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더라는 것이다. 급히 서울대병원으로 데려왔건만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