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과시절에는 비교적 많은 여행을 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본토나 만주(滿洲)를 제외하고는 외국여행이 불가능했다. 일반적으로 여행은 국내여행으로 제한되었다. 교수나 선배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여행을 많이 하라고 입버릇처럼 타이른다. 소위 무전여행(無錢旅行)에 심취했던 때도 있었다.
예과 1학년 여름방학 중에 겪었던 여행이 생각난다. 동기생인 이상일(李相一) 형과 함께 그의 고향을 방문했다. 해주(海州)에 있는 댁에 들러서 춘부장 어른께 큰절을 올렸다. 너무나 젊어 보이는 까닭에 형님 되시는 분이 아닌가 하기도 하였다. 이(李)형이 장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에는 얼떨떨했던 것이 사실이다. 춘부장께서 조혼(早婚)을 하셨기 때문에 이(李)형과의 연령 차이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해주댁에서 잠시 머무른 후 버스 편으로 본댁을 향했다.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기와집이었다. 이렇게 큰 집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다. 자당(慈堂)어른께 인사를 올려야겠다고 했더니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랐지만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밤도 한참 깊었는데 자당되시는 분에게 가자고 한다. 물론 큰절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조부님께서 인사 올려야 한다고 한다. 이(李)형이 말하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인사를 올렸더니 반갑다고 하신다. 몇 마디 말씀하시더니 정좌(正坐)하시며 미닫이를 여시고는 상일(相一)이가 왔다고 하신다. 위상에 회조부(會祖父)께서 계셨던 것이다. 인사를 올렸다. 같은 절차가 되풀이되었다. 고조부(高祖父)께서도 계신 것이다. 상당히 연로하신 것 같았다. 고조부의 자당어른이 계시지만 기동이 자유롭지 않으시니 인사는 안 드려도 좋겠다는 이야기다. 한 집에서 5대가 공존하는 것이다. 자당께 밤이 되어 인사를 올리게 된 이유도 알게 되었다. 여성이 함부로 남성을 만나서는 안 된다는 가풍 때문이었다. 웃어른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인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어 국토(國土)가 양분되었으니 이(李)형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리운 고향을 북에 두고 남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장남으로서의 이(李)형을 만날 때마다 옛적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민족의 비극을 새삼스럽게 원망하게 된다.
예과 2학년 때, 그러니까 1942년 여름방학 중의 일이 떠오른다. 그 당시 방랑벽이 있었던 큰 자형께서 만주 안동(安東)에 있는 모 생명보험회사의 사의(社醫)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누님과 자형을 뵈올 겸 해서 안동으로 갔다. 안동에는 어렵지 않게 여행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예과의 제모(制帽)를 쓰고 압록강(鴨綠江) 인도교를 건너고 있었다. 신의주(新義州)에 김용선(金鏞鮮) 형(1년 선배였다가 동기생이 된 분이었는데 해방 직후 병사(病死)했음)의 댁이 있었는데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다리 중간쯤에서 압록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굽이치는 물결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서 있으니까 누군가가 무엇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얼굴을 돌려보니 순사(巡査)였다. 강물을 보고 있다고 했더니 함께 가자고 한다. 신의주에 있는 순사가 주재소(駐在所)로 끌고 간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어느 학교냐고 묻는다. 성대 예과(城大 豫科)라고 했더니 그런 학교가 어디 있느냐고 다그친다. 대학에는 학부가 있는 것인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한다. 복장도 대학생 복장이 아니라고 나무란다. 말투로 보아 한국 사람임에 분명하다.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또 한명의 순사가 들어왔다. 소장인 모양이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이 학생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조사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소장으로 보이는 순사가 어느 학교 학생이냐고 묻는다. 성대 예과(城大 豫科)라고 했더니 수고가 많다고 하며 먼저 순사가 무례했던 것을 이해하여 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전자에게 성대 예과란 이런 이런 학교인데 그런 것쯤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나무란다. 별로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색안경으로 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소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일본인이었는데, 일본인으로부터 나무람을 받는 한국인 순사가 측은하기만 했다.
예과 생활이 끝날 무렵의 방학 중의 일이다. 일본의 히메지[姬路]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송태섭(宋台燮) 형과 금강산(金剛山)에 갔다. 송(宋)형은 중학교 때부터 친교가 있었던 동기생이었으며, 현재는 미국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데 나와는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지라 무던히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둘이서 남이야 뭐라 건 떠들어댔다.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당시 예과나 고등학교의 수학 연한이 반년 단축되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예과시절의 최종 여행인 셈이었다. 경원선(京元線)을 타고 안변(安邊)에서 동해안을 하행하면 외금강(外金剛)역에 도착한다. 도중의 경관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는데 해금강(海金剛)의 아름다움은 이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돋보였다. 이 지구상에 이렇게도 아름다운 곳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감탄했다.
해금강(海金剛)에서 시간을 보낸 후 온정리(溫井里)로 향하였다. 하도 더워서 두 사람이 다 같이 상의를 벗고 막대기에 배낭을 걸고 팬츠 차림으로 걸어갔다. 막대기 끝을 서로 쥐고 걷는 것이니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구슬 같은 땀이 흐르고 이러다가 일사병(日射病)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고 농반진반으로 투덜거리면서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큰소리로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친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소리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더니 더 큰소리로 손짓을 하면서 호령하는 데로 따라갔더니 순사가 부르는 주재소(駐在所)이다.
들어서자마자 불량학생이라며 저지른 풍기문란죄(風紀紊亂罪)는 그대로 넘길 수 없다고 일갈한다. 겁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오죽하면 이 꼴이 되었겠느냐고 하소연을 했다. 조서(調書)를 꾸미기 시작했다. 예과생과 고교생이라는 것을 알자 태도가 누그러졌다. 아무리 예과생이나 고교생이라고 할지라도 너무하지 않느냐고 웃으면서 말하더니, 땀이나 식히고 가라고 한다. 조서도 집어치웠다. 마음 상할 것 없다고 오히려 위로해 준다. 예과생이나 고교생의 덕을 상당히 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