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敎授)와 학생(學生)_4 (173회)
  제20장 수상(隨想)1

사제지간(師弟之間)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학생은 언제나 학생이라는 관념이 강한 것이다. 자식이 아무리 성장해서, 심지어는 노인이 됐을지라도 자식인 것처럼 말이다.

벌써 40년 가까이 흐른 옛이야기지만 그래도 당시 필자의 나이가 30여세였으니까 아주 어릴 때라고는 할 수 없다. 이화여대(梨花女大)에 출강할 때인데 하루는 우연히 현관 앞에서 대선배이신 약리학의 이세규(李世珪) 교수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전번에 교수실로 찾아뵈었더니 부재 중이셔서 이렇게 결례를 하게 되었다고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교수님께서는 무던히 반가우신 모양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더니 “자네 많이 컸군” 하신다. “네” 하고선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교수님이 이화여대(梨花女大)로 옮기시기 전에는 모교인 서울의대에서 근무하셨으며 한때는 학생과장직을 맡으신 일도 있었다.

학생과장직을 맡으시기 전인지 후인지 기억이 분명치 않으나 그 무렵 나는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에 이(李)교수의 강의를 직접 받은 일은 없지만 비교적 선생님을 가까이 뵙게 될 기회가 많았었다. 어떻든 ‘많이 컸다’는 그분의 인사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점차로 무엇인가 가슴이 뿌듯해지고 흐뭇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사제지간(師弟之間)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겠는가!
 
일제 때 경성제대 의학부 위생교수실에 미즈시마 하루오(水島晴夫)라는 교수가 있었다. 일제 때지만 미국에 유학하여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보건학박사(保健學博士) 학위를 취득하였고 1930년대의 인구를 대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생명표(生命表)를 작성한 분이다. 큐슈제국대학(九州帝大)로 전출한 관계로 필자는 직접 배우지 않았으나 해방 후에 ‘맥아더’ 사령부의 인구분야 최고 자문관이 되었고 UN의 인구위원회 위원이었고 해서 이 분의 성함은 익히 알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쿄(東京) 근방 요코하마에 있는 이분 댁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 때 이야기로는 죽기 전에 서울을 한번 방문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는 것이다. 다음 해 가족계획 관계회의에 참석하시도록 주선해 드렸다.

체한중(滯韓中) 서울의대에서 행한 미즈시마(水島)교수의 특강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옛 제자들도 많이 모였다. 옛 제자 중에는 나보다 18년 선배이신 L박사님도 계셨다. 미즈시마(水島)교수 지도로 학위를 받은 한국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인사 중 한분이었다. L박사님은 서울로부터 꽤 떨어진 곳에서 개업을 하고 계셨는데 일부러 상경하신 것이다. 대단한 성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특강의 통역을 맡았는데 미즈시마(水島) 선생과 같이 점잖은 언사와 매너를 쓰는 분은 흔히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학자형의 신사인데다가 호인형의 노인이었다. 특강 후 미즈시마(水島) 교수를 위한 리셉션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잊히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 서울대 총장 시절 인터뷰 (경향신문 1982. 8.26.)

아무리 백발이 성성할지라도 미즈시마(水島) 교수는 제자에게는 반드시 ‘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특히 L박사님은 미즈시마(水島) 교수가 L군이라고 부르면 어쩔 줄 모르며 황송한 듯 제자의 예를 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미즈시마(水島) 교수는 자식이나 손자 또래밖에 되지 않는 나에게는 깍듯이 선생이라고 호칭한다. 직접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제아무리 연소할 지라도 경칭(敬稱)을 붙이지만 자기의 직접 제자인 경우는 연령에 관계없이 ‘군’으로 통한다. 이러한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근자에 교수와 학생, 은사와 제자 사이의 정(情)과 의(誼)가 점차 흐려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느낌이다. 하긴 모든 것이 변하는데 이러한 정이 나만이 예외일 수 있을까마는 어쩐지 이 예외가 바람직하게 생각되는 것은 내가 시대에 맞지 않는 교수인 탓일까.

미즈시마(水島) 교수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소원을 푼 셈이다. 그런데 왜 그런지 横浜(요코하마)댁으로 찾아갔던 때의 일이 잊히지 않는다. 묵고 있던 도쿄(東京)의 호텔에서 요코하마에 전화를 걸었더니 금세 미즈시마(水島) 교수가 나왔다. 사연을 설명하고 찾아뵙겠다고 하였다. 横浜(요코하마)역에서 내리고 택시를 탄 다음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자세하게 일러준다. 그대로 하였다.

택시를 타고 가다보니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 한 분이 택시를 하나하나 세운다. 우리 차례가 왔다. 혹시 한국에서 오신 권(權)박사가 아니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내가 미즈시마(水島)라고 하며 반가워한다.

댁은 하차지점에서 멀지 않았다. 서재로 안내되었다. 비교적 넓은 방이었지만 생명표(生命表) 등으로 꽉 차 있었다. 부인이 과일을 갖고 나왔다. 미즈시마(水島) 교수는 과일을 들으라는 말도 없이 감회어린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러더니 최희영 군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최 선배는 원래 미즈시마(水島) 교수의 수제자였으며 한국인 생명표(生命表)를 최초로 만들어낸 분이었다.

해방 후 모교 예방의학실의 주임교수였는데 6․25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갔다고 했더니 찾아가서 데리고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렇게는 안 된다고 설명하였지만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고 한다. 그 국보적인 사람을 찾으려하지 않는 것이 괘씸하다고까지 극언한다. 우리 실정을 너무나 모르는 것이다. 분단된 나라의 설움을 모르는 것이다.

되풀이 설명을 하고 지금은 생사조차 모른다고 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슬프게 운다. 제자를 생각하는 스승의 눈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사제지간(師弟之間)에는 국경이 없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총장 때의 일이다. 학생들이 좀처럼 인사를 하지 않는데 어느 봄날 오후 출타했다가 돌아와 하차하고 계단을 오르고 있으려니까 한 학생이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한다. 기특했다. 그 뒤에는 네 명의 학생이 서 있었는데 인사를 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었더니 총장님이시죠 하고 답한다. 그렇다면 왜 인사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모든 학생이 총장님에게 인사를 하면 귀찮아서 어떻게 하느냐는 변이었다. 총장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인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서울대 본부 뒷길을 데모학생들이 뛰고 있었다. 사회대 근처에서 시작하여 ‘아크로폴리스’광장으로 모이는 과정이다. 나는 학생들이 뛰는 것을 멀끔히 쳐다보고 있었다. 학생 하나가 나를 보더니 인사를 한다. 손짓으로 불렀더니 다가온다. 나중에 총장실에 들르라고 했다. 내 딴에는 상당히 신통하게 느껴져서 그랬던 것이다. “총장님 그렇게는 못합니다. 사쿠라로 몰리게요”하며 사라졌다.

그 시절만 해도 낭만(浪漫)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사이는 너무나 각박하다. 학생의 데모가 아니라 직업적인 데모로 밖에 볼 수 없을 만큼 격렬하고 투쟁적인 것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교수(敎授)와 학생(學生)_3 (172회)
  나의 엘리트관(觀)_1 (1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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