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카대학(創價大學)과 덴리대학(天理大學)_1 (183회)
  제21장 수상(隨想)2

일본의 여러 대학 중에서도 도쿄대학(東京大學)이나 교토대학(京都大學) 등은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들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소카대학(創價大學)과 덴리대학(天理大學)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 대학이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점도 있었지만 왜 그랬는지 방문 대상에서 빠지기 일쑤였다.

1987년 1월 말에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에는 방문 대상교로 이 두 대학을 포함(包含)시켰다.

1월 31일 소카대학(創價大學)을 방문하였다. 토요일(土曜日)이었는데도 다카마츠 학장(高松 學長), 와카에 국제부장(若江 國際部長), 진형화(陳荊和 · Chen Chingho) 아시아 연구소장(硏究所長) 등을 위시한 여러분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도쿄(東京) 도심으로부터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하치오지(八王子市)에 소재(所在)하고 있는 대학이었는데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짜임새 있는 ‘캠퍼스’가 인상적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주 일본(駐 日本) 한국대사관(韓國大使館)의 교육관(敎育官)과 세이쿄신문(聖敎新聞)의 오하라 테루히사(大原照久) 씨가 있었다. 오하라(大原)씨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후술(後術)하기로 한다.

소카대학(創價大學)의 이념(理念)이 교육(敎育)․문화(文化)․평화(平和)의 세 가지라는 점, 아시아 연구소(硏究所), 평화문제연구소(平和問題硏究所) 등 5개 연구소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국제심포지엄이 활발하게 운영된다는 점, 미국(美國)․소련(蘇聯)․중공(中共) 등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과 교수를 교환하고 있다는 점, 85년부터 ‘파리’에서 어학연구(語學硏究)센터를 개설하고 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분교(分校)를 설치하고 며칠 후인 2월 5일에 개교한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다.

학장은 개교 준비 차 도미(渡美)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일부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여 죄송하기도 하였다. 물론 학내시찰(學內視察)도 하였고 교수진과 간담회도 가졌다. 그런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글연구회’라는 서클 멤버들의 환대였다. 83년에 이 서클이 결성되고 20여 명의 회원이 있는데 매년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에 대한 지식과 인식을 높이는 한편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는 강의실에 들어가니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환영 모임을 시작하겠노라고 선언 했다. 놀라운 것은 우선 전 회원이 ‘아,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노래를 완벽하게 합창한 다음 교가를 부른 일이다. 일본(日本) 땅에서 일본인 학생이 교가보다 ‘아,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먼저 부르니 인상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학생 대표가 서투른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한국의 젊은 학생과 일본의 젊은 학생들이 보다 깊은 유대를 갖고 싶다는 내용이다. 미력하지만 학생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나의 답사가 있었다.

그 후 질의 응답식으로 약 두 시간 동안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시간제약이 없었더라면 더 오랫동안 자리를 같이 하고 싶은 심정(心情)이었다.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다가 6․25동란(動亂)에 관하여 언급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6 ․ 25는 북침(北侵)이 아니라 남침(南侵)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극히 상식적으로 설명하였는데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표정이었다.
 
▲ 소카대학(創價大學) 본관 앞

귀국 후 수주일이 지나서 장문(長文)의 편지를 받았다. 참으로 인상적인 만남이었다는 인사에 이어 북침설(北侵設)에 대하여는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고 이미 시정을 하였고 채널을 밟아서 한국정부(韓國政府)애도 사과의 뜻을 전한 바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소카학회(創價學會)의 출판물(出版物) 중에 6․25에 관하여 애매하게 서술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러한 출판물(出版物)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고 그저 상식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학생들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일부러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이 편지를 받아 보고 유언비어(流言蜚語)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한글연구회’ 회원들은 가끔 소식을 보내온다. 동기가 어찌되었건 기특한 일이다. 그리고 연간 한 번씩은 꼭 방한(訪韓)하는 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 해 10월에는 아시아연구소장(硏究所長)인 진형화(陳荊和 · Chen Chingho) 교수가 연구소의 연구원 10명을 인솔하고 내한(來韓)하였다. 한국의 문화(文化)와 직접 접해보겠다는 목적이었는데 부러운 이야기다. 연구원이 집단적으로 문화시찰(文化視察)에 나선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2월 4일에는 덴리대학(天理大學)을 방문하였다. 처음 가 본 덴리대(天理大)는 마치 용궁(龍宮)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덴리교(天理敎) 본부가 있고 덴리대학(天理大學)이 있는데 전국에서 몰려드는 신도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소위 ‘오모야(母屋) <*주요 건물, 본관>’이 인상적이었다. 몇 호 까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단한 대학이었다. 그 중의 하나는 영빈관(迎賓館)역할을 하는 것 같았는데, 이 외에도 어떤 역할을 하는 오모야(母屋)들이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주 오사카(駐 大阪) 총영사관(總領事館) 영사가 동행해 주었는데 차 안에서 설명해 준 덴리대학(天理大學)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소카대학(創價大學)에서와 같이 많은 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학장실에서 들은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세계(世界)의 평화(平和)와 조화(調和)를 교리(敎理)로 하는 덴리교(天利敎)의 이념(理念)을 전파시킬 목적으로 1925년에 외국어대학으로 출발하였다 한다. 한국어과는 설립 당시부터 개설되었으며 한국어교육기관(韓國語敎育機關)으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으며 현재 일본에서 한국어교육(韓國語敎育)의 선구자적(先驅者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도서관과 박물관이 유명한데 실제 시찰해 보니 설명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세종(世宗) 때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보았을 때에는 야릇한 심정을 맛보았다. 히라키(平木) 교수가 유창한 한국어로 설명해 주었는데 이 분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구하였으며 내가 서울대 총장이었던 때에 학위를 수여받았다고 하며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기(前記)한 영빈관용(迎賓館用) 오모야(母屋)에서 대학간부(大學幹部)들과 함께 성찬을 대접받았다. 멋있게 꾸며진 건물이었다. 봉사원 중에는 한국인이 있었는데 일부러 배려한 것 같았다. 학문적 종교적 입장에서 한국과 긴밀한 유대를 갖기를 원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앞서 오하라 테루히사(大原照久) 씨에 관하여는 후술(後術)하겠다고 했는데, 여기서 적어보기로 한다. 1983년 7월로 기억되는데 오하라(大原)라는 분으로부터 면담(面談) 신청이 왔다. 한국을 깊이 알고 싶은 사람이며 꼭 만나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청해 왔다. 세이쿄신문사(聖敎新聞社)의 편집위원이란 신분을 가진 분인데 이 신문의 성격을 몰라서 처음에는 어쩔까 했는데 면담요청(面談要請) 문면(文面)과 내용(內容)이 하도 훌륭해서 만나보겠다고 알려주었다.

7월 어느 날, 약속대로 오하라(大原)씨가 서울대학원 총장실로 찾아왔다. 진지하고 예의(禮儀)바른 분이었으며 호감(好感)을 주는 신사라고 느껴졌다. 일제시대(日帝時代)때 우리들이 겪었던 일들을 격의 없이 이야기 하였다. 일제(日帝)가 그렇게까지 악독하였는가 하고 적이 놀라운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이야기는 일제시대로부터 해방(解放) 당시, 6 ․ 25동란(動亂), 그리고 장래에 대한 견해 등으로 이어졌다.

오하라(大原) 씨는 한국에서 얻은 견문을 ‘한국(韓國)’이라고 제(題)한 책으로 엮었다가 후에 ‘표정(表情)’이라고 제(題)하여 1986년 5월 나에게도 이 책을 보내주었다. 오하라(大原)씨는 1981년 7월, 82년 4월, 83년 7월에 3회에 걸쳐서 방한(訪韓)한 바 있으며 상당히 깊이 있게 우리나라를 관찰하고 있다.

같은 해인 1987년 7월에 일본(日本)을 거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방문(訪問)하게 되었다. 교과교육(敎科敎育)에 관한 토의(討議)가 주목적(主目的)이었는데 도쿄(東京)의 나리타공항(成田空港)에서 주 일본(駐 日本) 한국대사관(韓國大使館)의 구창모(具昌謨) 수석교육관(首席敎育官)의 영접(迎接)을 받았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여장을 풀고 잠시 휴식한 후에 소카대학설립자(創價大學設立者)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씨를 만나게 되어 있다고 들었다.

구창모(具昌謨) 교육관(敎育官), 김시복(金時福) 대사관공보관(大使館公報官), 도쿄교육원장(東京敎育院長) 등과 함께 약속된 시간에 세이쿄신문사(聖敎新聞社)로 갔다. 현관(玄關) 앞에서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차하자마자 다가온 이케다(池田)씨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환영인사(歡迎人士) 중에는 다카마츠 학장(高松 學長)과 오하라(大原)씨도 있었다.

이윽고 넓은 회의실(會議室)로 안내되었다. 호화롭게 꾸며진 회의실(會議室)이었으며 정식(正式)으로 좌석배치(座席配置)를 하는 등 세심(細心)하게 준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케다(池田)씨와 대담(對談)이 시작되었다. 한국어에 능란한 여성통역을 통하여 1시간 반 정도 의견을 나누었다. 한일(韓日)간의 여러 가지 문제를 특히 교육적 측면에서 토의하였다. 그리고 젊은 세대(世代)에 대한 기성세대(旣成世代)의 책임(責任) 등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상호간에 표출하기도 하였다.

 
  고희(古稀) (18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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