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부 진학 때 의학부장은 이마무라[今村 豊] 교수였다. 대머리였던 이마무라[今村]교수는 우리가 예과를 수료할 때 수료식(修了式)에 참석하여 총장 대신 축사를 한 일이 있다. 사전에 원고를 읽어보지 않고 낭독한 것 같다. 군데군데 말이 연속되지 않아 실소(失笑)했다. 이런 해프닝 때문에 이마무라[今村]교수는 우리들 머리에 남아 있었다.
의학부에 진학 후 첫 번째 시간이 이마무라[今村]교수의 해부학 강의였다. 등단하자마자 우리들을 째려보더니 한마디 한다. "너희들은 잘났노라 하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있는데, 한 달만 지내보라.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들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대로 적중했다. 한 달이 지나고 보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아졌다.
이마무라[今村]교수에 관한 일화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오늘날의 반상회 같은 조직이 학내에도 있었다. 토나리구미[隣組]라고 불리는 이 모임은 학생 10명에 지도교수 1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관례였다. 학부 1년 때 내가 속해 있던 토나리구미의 지도교수가 이마무라[今村]교수였다. 간혹 학외로 초대해주기도 했다.
한 번은 카페로 우리들을 초청했다. 카페는 접대부가 술을 대접하는 곳이었다. 이마무라[今村]교수는 마음대로 마시라고 했다. 그러나 교수 앞에서는 누구도 술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교수에 대한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 관념이 농후한 때였다. 술값을 지불하기 위해 이마무라[今村]교수는 100원짜리 지폐를 내놓았다. 카페주인이 쩔쩔 맨다. 거스름돈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마무라[今村]교수는 “후에 보내 줘” 하며 자리를 뜨자고 한다. 당시 100원은 대단한 돈이었다. 나는 그 때 두 번째로 100원짜리 지폐를 본 셈이다. 어릴 때에 선고께서 1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신 일이 있었다.
이마무라[今村]교수가 무슨 생각으로 학생들 앞에서 100원짜리 지폐를 내놓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일본(日本) 대학교수의 보수는 대단했던 것 같다. 해방 후 이마무라[今村]교수는 일본으로 돌아가 신슈[信州]대학 학장이 되었는데, 박사학위 수여관계로 스캔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해부학 실습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늦은 가을날의 일이다. 실습에 열중하고 있으려니까 2년 후배인 예과생 K형이 황급히 찾아와 만나자고 한다. 실습실 밖으로 함께 나가서 이야기를 들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억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보건실(保健室)로 왔다가 몇몇 친구와 어울려 함춘원(含春苑)으로 산책을 갔다고 한다. 우리말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으려니까 뒤에서 오던 일본인 학생이 난데없이 다가와서 때렸다는 것이다. 우리말을 썼다고 해서 구타당한 것이다.
일본인 학생은 예과 기숙사인 진수료(進修寮) 학생대표라 한다.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K형에게는 너무 상심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즉시 몇몇 학우들과 상의하고 함께 청량리(淸凉里)로 떠났다. 일행은 김종설(金鐘卨), 김정진(金楨鎭), 차상임(車相壬) 형 등 4명이었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인 학생대표를 호출하였다. 일본인 학생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알고 있다고 하면서 내 이름까지 댄다.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나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내가 앞장을 서서 기숙사(寄宿舍) 뒤에 있는 야산으로 올랐다.
나와 일행이던 급우 한 사람이 일본인 학생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뺨을 때렸다. 서너 차례 때렸던 것으로 기억난다. 일본인 학생이 코피를 흘렸다. 뺨을 친다는 것이 빗나갔던 것 같다. 순간 나는 다소 당황했다. 그리고 일본인 학생에게 말했다. "어째서 주먹이 날랐다고 생각하는가, 선배의 입장에서는 후배가 잘못된 것을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 조선말을 썼다고 해서 친구를 구타하는 법이 어디 있나. 조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일본말을 쓰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자기 모국어를 쓰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라고 했더니, 이 학생은 "선배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연거푸 허리를 굽힌다.
나는 일행과 함께 이 학생을 데리고 청량리(淸凉里 )역 근처의 막걸리 집으로 갔다. 상당히 취기가 올랐다. 일본인 학생은 많은 것을 배웠다면서 역시 "선배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이번 일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가까워졌나.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제의했다. "물론입니다. 저도 기분이 대단히 좋습니다" 하며 송구스러워했다. 서로 악수를 나누면서 헤어졌다.
1주일 쯤 지난 후 전보(電報) 한 장이 배달되었다. 다음날 10시에 학생처장실(學生處長室)로 출두하라는 내용이다. 그 당시에는 학생을 호출하는데 전보가 자주 사용되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다음날 학생처 비서실로 출두했다. 지금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만 평소 한국인 학생들에게 편견이 있는 학생처 사무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처장실로 안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