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병제도(學兵制度)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형식은 지원제이다. 그런데 지원자가 예상 외로 적었던 모양이다. 의학이나 이공학 분야 등 자연계는 면제되었다. 하루는 의학부 본관 옆에 있던 2층 목조식당(木造食堂)에서 회의가 열렸다. 나는 총대(總代)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일본인 학생들은 소리 높게 규탄했다. 어떤 학생은 조선인 학생을 모조리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배속장교인 오이와[大岩 實ㆍ오이와 미노루]소장(小將)이 여러 학생들의 주장 아닌 고함을 듣고 나서 입을 연다.
'제군의 충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이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하려 했을 때, 일본에서조차 극심한 반대운동이 있었다. 반도에서 반대운동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느냐'라고 하니까, 떠들어 대던 학생들이 조용해진다. 오이와[大岩]소장은 나를 응시하면서 다시 입을 연다. '학생들 중에 반도인 학생은 자네 하나뿐이지?' 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명령한다. 전시(戰時) 일본의 모습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한 장면이었다.
일제시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나는 1980년 6월에 서울대학교 총장이 될 무렵에 수상집(隨想集) "내 일에 산다"를 발간한 일이 있다. 물론, 총장직을 맡기 전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이 수상집에 실린 "기행괴벽(奇行怪癖)"을 전재하면서 당시를 회상해 보기로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방에 기다란 테이블이 있다. 맞은편에는 생화학(生化學)의 N교수가 신경질적인 눈매를 하고 앉아 있다. 이쪽에는 의자가 다섯 개, 테이블 위에는 담배 다섯 개비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방에 들어선 다섯 명의 학생은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 앉으라는 교수의 명령이다. 학생들은 단정하게 자리를 잡는다.
엄숙한 분위기다. 지금부터 1년에 한번밖에 없는 구두시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두가 전전긍긍한 모습이다. 데코레이션이라곤 하나도 없는 방인지라 부드러운 느낌은 도대체 찾아볼 수 없다.
침묵이 계속된다. N교수의 입만 주시하고 있다.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곁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큰 죄(罪)라도 지은 사람 같다. 앞에 담배가 다섯 개비가 놓여 있었지만 손을 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완전히 얼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교수의 입이 열렸다. 대갈일성(大喝一聲)! "이 녀석들 다 나가라! 앞에 있는 담배는 피우라는 것이지 보고만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전부 재시험!" 어처구니 없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쫓겨 나왔다.
며칠 후 다시 방을 찾았다. 5인 1조(組 )의 학생은 제 나름대로 지껄이다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묵이다. 같은 테이블이었지만 담배는 없다. 순서대로 앉았다. 재시험이 시작되었다.
"여기 적혈구(赤血球)가 있는데 이것을 한없이 세분(細分)해가면 맨 나중에 무엇이 남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아 그것도 몰라! 그러나 좋다. 나도 모르니까. 그런데 자네, 맨 나중에 남는 가상물질(假想物質)에 생명이 있을 것 같은가, 없을 것 같은가?"
"제 생각으로는 있을 것 같습니다."
"됐다. 잘 알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자네 성적은 90점이다."
대단한 구두시험이다. 방에서 해방되자 가가대소(呵呵大笑)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다. 지금도 생화학교실에 들르게 되면 혼자서 웃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영문을 알 까닭이 있겠는가.
강의시간을 바꿀 일이 있어서 연락을 하러 해부학(解剖學) 교수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하니 들어오라는 분부시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 하니 교수 세면대에서 실례하고 있는 도중이다. 대경실색 기겁을 해서 문을 닫았다. 들어오라는 교수의 우렁찬 목소리가 또 들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전히 실례하고 있는 중이다.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용건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러이러한 관계로 강의시간을 변경하여 주십사고 하였다. 좋다는 답변이다.
실례하는 시간이 길기도 하다. 더 서있으려니까 또 용건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없다고 하니 돌아가라는 명령이다. 존귀(尊貴)한 선생님이 실례하고 계신 동안에 퇴장하는 것이 정말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기다렸을 뿐이다. 실례하고 있는 선생에게 최대의 경의(敬意)를 표해 보기는 이것이 처음이고 끝이다.
I교수에 붙어 다니는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이다.
해부학 실습실에서이다. 몇 구(具)의 시체가 여러 형태로 실습대 위에 놓여 있다. 대체적인 설명이 끝난 후 교수의 데몬스트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처음 당하는 시체실습(屍體實習)인지라 모두가 조용히 교수가 쥐고 있는 칼끝을 주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보기 좋게 시범을 하더니 시체를 잡고 있던 당신의 왼손까지 절개(切開)하였다. 모두들 긴장이 풀리고 우습긴 하였지만 누구고 소리 내어 웃지는 못한다. 왼손에서 피가 흐른다. 입고 있던 가운에 뭉겨 대더니 왈 "자네들한테 이런 식으로 절개실습(切開實習)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범한 것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