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인 1945년 8월 15일, 저녁때까지 나는 해방된 줄을 몰랐다. 숯을 굽는 쵸바(丁場 ,구역)의 인부가 배급 양곡신청서를 가지고 사입장(舍入場)에 갔다가 돌아와서, 평화(平和)가 왔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나는 순간 '혹시'하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사입장(舍入場)으로 달렸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라디오를 청취할 길이 없었다. 약 20Km 거리였는데 내 딴에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저녁 무렵에는 근처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떤 가게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안재홍(安在鴻) 선생이 삼천리 강산(三千里 江山)에 평화가 왔다고 감격어린 연설을 하시지 않는가. 꿈인가 생시인가 하였다. 나는 흥분한 상태로 산에 되돌아왔다. 함께 일하던 인부들을 모이게 하였다. 이미 밤 10시를 넘겼을 시각이었다. 나의 입장을 처음으로 털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는 떠난다고 하였다. 떠나면 우리들은 어찌 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왕 정(情)이 들었으니 같이 살자고 간청하는 분도 있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되풀이하여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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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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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사입장(舍入場)으로 달려갔다. 기차가 언제 올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역(驛)에서 몇 시간인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기관차 앞에 태극기(太極旗)를 달고 기차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역에는 나 이외에도 몇 사람이 있었는데 다함께 만세(萬歲)를 불렀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물론, 기차표도 없었다. 기차에 올랐다. 모든 사람이 흥분의 도가니였다. 누가 준비했는지 '애국가(愛國歌' 가사를 돌렸다. 모두들 애국가를 합창한다. 그리고는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소리 높여 외친다. 그날 밤 늦게서야 서울역에 도착했다. 운행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기차는 역마다 정거하였다. 그럴 때마다 비슷한 현상이 되풀이 되었다.
8월 17일 아침, 그리웠던 모교에 등교했다. 나는 개선장군과도 같은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직도 대학은 일본인 관장 하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웠던 학우들을 만났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개월 만에 만나는 것이니 감동(感動)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3학년생의 강의실은 시계탑(時計塔) 서쪽 건물에 있던 B강의실이었다. 나는 2학년 후반기 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3학년생이 된 셈이다. 일부 한국인 학생이 도피했거나 구속되었던 일제 말기에 외국에서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합쳐져 우리 급우들은 53명이 되었다.
병원 앞길에서 제일 먼저 만난 교수는 공교롭게도 미생물학의 쿠도(工藤 正四郞ㆍ쿠도 마사시로)교수였다. 쿠도[工藤]교수는 그 동안 잘 지냈느냐고 하며 어깨를 어루만진다. 구도[工藤]수는 후에 동경대학(東京大學) 전염병연구소(傳染病硏究所)에서 근무하다가 소장이 되었다. 나는 언젠가 동경(東京)에 갔을 때 소장으로 일하고 있던 구도(工藤)교수를 방문한 일이 있다. 그에게는 순진한 학자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다음으로 만나게 된 인사는 약리학의 오자와[大澤]교수였다. 병원에서 의학부로 내려가는 언덕길에서 만났다. 나를 보더니 반색하시면서 건강상태를 묻는다. 덕분에 잘 있었다고 대답했다. 도피 중에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도피 중에는 이일 저일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만일에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보복해야 할 대표적인 대상으로 오자와[大澤]교수를 꼽았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게 되니 그게 아니었다. 사제지간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8월 16일, 대학 내에서는 한국인 직원들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京城大學 自治委員會)'가 결성되어 야마노우치[山家]총장에게 학내의 경비와 문화재보관책임의 이양을 요구하고 대학 내 각 방의 열쇠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듣고 있었다. 8월 17일에는 대학 정문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간판에는 '제국(帝國)'두 자 위에 흰 종이를 붙여 '경성대학(京城大學)'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처음 등교하던 날 태극기(太極旗)가 날리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20일, 일본군부대 일부가 법원학부에 진주하여 태극기는 내려지고 자치위원회(自治委員會)의 간판도 철거되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로 생각되는데 해부학의 우에다(上田 常吉ㆍ우에다 츠네키치)교수가 학생들을 의학부 3층 강당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다. 우에다[上田]교수는 1935년 10월부터 3년 간 의학부장직을 맡았었는데 44년 7월부터 해방 때까지 재차 의학부장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름 있는 해부학자였으며 가장 고령의 교수이기도 하였다. 우에다[上田]교수는 명이 있을 때까지 자기 직책을 다한다는 점과 앞으로 일어날 일은 잘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자중해 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때만 해도 미군이 진주하기 전이며, 정권이 한국으로 넘어오기 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