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우리들에게는 차가운 바람이 더욱 심하게 불어왔다. 아무리 따져 봐도 일본에게 승산이 없는 것은 분명하였다. 44년 6월 어느 날 오후,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정성장(鄭聖璋) 형이 인사동(仁寺洞) 골목 헌책가게에서 진열된 책을 보고 있으려니까 어떤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무슨 책을 구하려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우리 나이 또래로 보이는 이 낯선 사람이 서점 가까이 있는 방으로 안내하면서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를 했다 한다. 그러면서 언제고 자기는 책가게에 있으니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했다 한다.
다음날 오전에 정(鄭)형은 이 이야기를 김정진(金楨鎭) 형에게 전했다. 당시 김(金)형은 시국문제에 관하여 대단히 관심이 컸었다. 김(金)형은 그 날 저녁 인사동(仁寺洞) 책가게로 가서 정(鄭)형으로부터 소개 받은 인사를 찾았다. 이 분의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김해(金海)라고 불러왔다 한다. 김해(金海)라는 분은 이 책가게의 직원은 아니지만, 가게 주인과 각별한 사이이며 가게를 자기 사무실과 같이 사용하고 있는 처지였다. 김(金)형은 김해(金海)란 분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김(金)형은 2주일간을 거의 매일같이 이 가게에 드나들었다고 회상한다.
가게에는 김해(金海)라는 분 이외에 또 한사람이 있었다. 김해(金海)라는 분은 후리후리한 큰 키인데 비하여 또 한 사람은 단구의 작은 몸집이었다. 김정진(金楨鎭) 형 측에서나 책가게 인사들이나 서로를 탐문하는 처지였다. 서로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김해(金海)씨는 어느 날 제동(齊洞) 구(舊) 경기여고(京畿女高)(현 헌법재판소) 건너편에 있는 조그마한 한옥으로 김정진(金楨鎭) 형을 안내하였다. 여기서 산해(山海)라고 칭하는 인사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분이 대한협동당(大韓協働黨) 당수였다. 김(金)형은 그때부터 동지를 규합하고 입당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우리 동기생들은 시간만 있으면 함께 모여서 세상 돌아가는 정세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모임은 대부분이 혜화동(惠化洞)에 소재한 김교명(金敎命) 형 댁에서 있었다. 김(金)형의 사랑방은 우리 동기생들에게는 어지간히 정이 들었던 곳이다.
하루는 김정진(金楨鎭) 형의 안내로 산해(山海)씨가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산해(山海)씨는 우리들보다 5~6세 연상으로 보였으며 후리후리한 키에 안색은 창백하였다. 폐결핵환자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조용한 어조로 세계정세를 분석하면서 궐기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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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째 형님과 나 / 의학부 진학 직후(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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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느 사립대학의 조교수라고 자기소개를 한 산해(山海)씨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일본이 필요로 하는 철강과 기름, 동남아시아가 가지고 있는 철강과 기름의 양 등을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도저히 일본이 승전(勝戰)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가 대단한 인물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한편, 김정진(金楨鎭) 형은 계속하여 산해(山海)씨와 그의 부하들인 책가게 인사들과 접촉해 왔으며 그들이 거사 거점으로 삼고 있다는 포천(抱川) 산속에 있는 아지트에도 가보았다고 한다. 포천(抱川)과 김화(金化) 접경의 산중에 있는 한 채의 낡은 한옥이 그들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그 집에는 독립투사를 자칭하는 50대 인사 외에 장총을 가진 젊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레지스탕스 투사인 것이다.
나는 10월 초에 성북동(城北洞) 김정진(金楨鎭) 형 댁에서 산해(山海)씨에게 입당(入黨) 선서를 하였다. 당시 입당절차는 개인별로 취해졌으며 같은 시간에 함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산해(山海)씨는 이제 곧 좋은 시대가 온다면서 힘을 내자고 하였다.
동기생 신백우(申白雨) 형은 재치 있고 운동 감각도 뛰어난 수재였다. 늦은 어느 가을날, 그는 김정진(金楨鎭) 형에게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 이야기를 하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신(申)형이 소개한 어느 젊은 사람을 만나 봤는데, 대단히 경망하게 느껴져서 더 이상 이 사람과는 만나지 않았다고 김(金)형은 술회한다.
12월초에 학기 말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 불안하게 느껴져서 나는 집에서 떠나 신설동(新設洞) 로터리 근처에 있었던 중학 동기인 안병훈(安秉勳) 형 댁에서 수일 간 지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교복이 아닌 옷 한 벌도 가지고 있었다. 학기 말 시험을 치를 생각으로 등교하였다. 시험장은 의학부 본부 건물 뒤의 제3강의실이다.
시험장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누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돌아다보니 서무과에서 근무하던 일인 여성 바바(馬場)양이었다. 나는 학생총대를 지냈던 관계로 바바(馬場)양과는 비교적 접촉이 있었다. 바바(馬場)양은 서무과에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 나를 찾고 있다고 한다.
당시 대학에는 교무과나 학생과가 따로 없고 모두가 서무과에 속해 있었다. 바바(馬場)양이 무언가 지편(紙片)을 들고 있었다. 훑어보니 협동당에 입당한 우리 동기생들의 이름이 아닌가. O․X로 표시되어 있는데, O표시가 되어있는 학생을 찾는다고 한다. 나는 바바(馬場)양에게 조금 후에 서무과로 가겠으니 돌아가라고 하고 시험장으로 갔다.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X표시가 되어있던 학우는 없었다. 순간 나는 이들이 체포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O자 표시의 이상일(李相一) 형, 김동섭(金東燮) 형, 김교명(金敎命) 형 등에게 사연을 전했다. 단체행동은 금물이니 각자 행동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우선 계단 밑 창고로 가겠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였지만 대학의 권위는 상당히 지켜졌다고 생각된다. 수사관도 서무과 이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
첫 시간은 미생물학 시험이었으며 감독관은 구도(工藤 正四郞ㆍ쿠도 마사시로))교수였다. 나는 앞으로 나가 구도(工藤)교수에게 변소에 가겠다고 했다. 쿠도(工藤)교수는 날씨가 춥기 때문에 소변이 마렵게 된다면서 다녀오라고 한다. 시험장인 강의실은 계단식이었으며 계단 밑은 공간이었다. 나는 계단 밑 창고로 갔다. 얼마 후에 김동섭(金東燮) 형과 이상일(李相一) 형이 역시 이 공간으로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