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한참동안 숨어 있다가 각자 개별적으로 피신하자고 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창고를 나왔다. 밖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기관실 옆을 지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명동 메이지좌(明治座)로 갔다. 당시 메이지좌(明治座)는 가장 큰 영화관이었다. 프랑스 영화인 '창살 없는 감옥'이 상영되고 있었다. 나는 되풀이하여 세 번을 관람하였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명치좌(明治座)를 나와 조원희(趙元熙) 형이 가정교사로 있던 당주동(唐珠洞) 거처로 갔다. 조(趙)형은 협동당(協働黨)과는 무관하였다. 대단히 큰 댁이며 수원(水源)의 대재벌인 차(車)씨가 주인이었다. 찾아가 보니 조(趙)형은 없었다. 대신 차(車)선생의 자당 되시는 할머니께서 맞아주셨다. 할머니는 나의 얼굴을 유심히 보시더니 집안에 모시고 있는 불당으로 나를 안내하신다.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합장 염불을 하신다. 그러시더니 나를 보고 남쪽으로 가지 말고 북쪽으로 가라고 하시며 10원을 주신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돈이었다. 나는 이 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 해방 후에 한 차례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차(車)선생 댁을 나와서 나는 신당동(新堂洞) 김소동(金蘇東) 선생 댁으로 갔다. 김(金)선생은 중학 동기생인 김한일(金漢日) 형의 백씨인데 나에게는 대선배이시다(「중학생활(中學生活) 절(節)」참조). 아직 김(金)선생은 귀택하지 않으셨고 부인만이 계셨다. 밤늦게 돌아오신 김(金)선생에게 사정 말씀을 올렸다. 젊은 사람이 뭘 그렇게 떨고 있느냐고 하신다.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격려해 주신다. 자신이 평양(平壤)에 본사가 있는 서선조림(西鮮造林)이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오늘 밤에 계획을 짜볼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잘 쉬라고 하신다.
다음날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김(金)선생 댁에 머물고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서 김(金)선생이 귀가하셨다. 기차표를 주시면서 그날 저녁 북행차를 타라고 하신다. 경기선(京畿線)에서 갈라져 만포선(滿浦線)을 타면 얼마 안가서 사인장(舍人場)이라는 역이 나온다면서 그 역에서 하차하면 차순욱(車淳郁)씨라는 분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분을 따라가라고 하신다.
서울역 까지는 김(金)선생이 안내해 주셨다. 인사를 올리고 기차가 떠날 때에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성을 찾고 기운을 내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사인장(舍人場)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한 분이 다가오더니 자기가 차순욱(車淳郁)이라고 하면서 함께 가자고 한다. 한참 걷다가 조그마한 주막집에서 요기를 한 것이 회상된다. 사인장(舍人場)에서 목적지까지는 약 20Km 쯤 되었다고 기억된다. 점심때 가까이 되어 도착한 곳은 숯을 굽는 곳이었다.
민가(民家)라고 해봐야 원시적인 형태의 초가집이 몇 채 있었다. 숯을 굽는 인부는 30명 정도였다. 차(車)씨는 이들에게 함께 일하기 위해 찾아온 분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들은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징용을 피해서 온 사람인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글을 쓸 줄 아느냐고 묻는다. 좀 안다고 하였다. 그러면 됐다는 것이다. 배급양곡(配給糧穀)을 타야 하는데 그 때마다 글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많은 곤욕을 치렀다는 것이다. 나의 주된 일은 배급양곡 신청서류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 일이라고 해봐야 간혹 있는 것이어서 시간 여유는 대단히 많았다. 나는 숯을 굽는 곳에 가서 서투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도와주는 것이 일과였다.
화전민(火田民)이라고 할 수 있는 인부들은 순박하기 짝이 없었다. 욕심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좌절감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은 나를 보고 결혼하라고 강하게 권한다. 동네에 마땅한 처녀가 있다는 것이다. 나도 이 처녀는 몇 차례 본 일이 있다. 물론, 나에게 결혼 생각이 있을 리 만무하다. 권유를 뿌리치는 일이 쉽진 않았다. 될 수 있는 대로 지연작전을 썼다. 식사는 조밥에다 고추장 정도였다. 그래도 식욕은 언제나 좋았다.
동네 사람 중에서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 산골 생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때로는 혼자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우주(宇宙)의 신비를 생각해 보기도 했고, 해질 무렵에는 석양(夕陽)을 보고 다시 떠올라 내일을 약속하자고 혼잣말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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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협동단사건에 관련된 동문들이 1947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찍은 사진. 필자는 협동단에서 항일운동 중 평남 ‘사인장’이란 곳에 피신했는데, 그 인연으로 납북 중 사인장에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줄 왼쪽 두 번째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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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맞이한 후에야 대한협동당(大韓協働黨)에 관한 궁금증을 풀었다. 당수인 산해(山海)씨는 옥사하였고 그의 부하들도 거의 모두 투옥되었었는데, 몇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대한협동당(大韓協働黨)에 가담했던 우리 동기생 즉, 김정진(金楨鎭), 임광세(林光世), 김교명(金敎命), 이상일(李相一), 차상임(車相壬), 김경동(金庚東), 김동섭(金東燮), 최창준(崔昌俊), 정성장(鄭聖璋), 신백우(申百雨) 형과 나를 합한 11명 중, 임광세(林光世), 차상임(車相壬), 김경동(金庚東), 최창준(崔昌俊), 정성장(鄭聖璋), 신백우(申百雨) 형 등 6명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들 제형은 44년 12월에 구 경기도경찰부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다가, 45년 1월 말경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5월 말에 옥고(獄苦)에서 풀려나 석방이 되기는 하였지만, 학교로부터는 모두 무기정학(無期停學) 처분을 받았고 주거는 제한되었다 한다. 해방이 될 때까지 사상선도(思想善導)란 명목으로 시달림을 받아온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중에서 임광세(林光世) 형은 탈옥혐의로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도경구치소에 있을 때 옆자리에 있던 사람이 톱을 만들고 이것으로 마룻바닥을 잘라 탈옥하려다가 발각이 된 사건이 있었는데, 임(林)형도 연루 의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임(林)형은 포천(抱川) 현지로 가기로 한 약속이 있었는데, 소식이 없어 총지휘를 맡고 있던 김정진(金楨鎭) 형의 댁에 갔다가 망보고 있던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한다. 성북동(城北洞)에서 체포되어 삼선교 쪽으로 연행되어 가다가 전차정류장에 서 있는 김정진(金楨鎭) 형을 보고 눈짓을 해 김(金)형은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林)형을 체포한 형사는 이세(伊勢), 시바다(紫田)라고 하는 한국인 형사였음이 밝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