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두고 장래의 진로에 관하여 의견교환을 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국대안(國大案) 반대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47년 8월 31일에 서울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졸업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있었던 일들 해방 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감회가 무량했다.
우리 동기생은 총 53명이었는데, 이 중 구(舊) 성대(城大) 예과(豫科) 때부터 함께 공부해 온 학우가 30명이고 나머지 23명은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해방을 전후해서 합쳐진 학형들이다. 전원이 모교 3층 강당에 모여서 열띤 토론을 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우리 동기회의 명칭 문제와 각자의 지원상황이 상정되었다. 여러 가지의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결국 '근인회(槿仁會)'라는 명칭이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근역(槿域) 즉, 삼천리강산 인술(仁術)의 모임이란 뜻이다.
당시에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어느 교실(敎室)이고 갈 수 있었다. 대체로 안배하는 형식을 취했다. 요즈음과는 땅과 하늘 사이 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젊은층이 졸업 후에 고민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차상임(車相壬) 형과 함께 예방의학교실(豫防醫學敎室)에 입국(入局)하기로 했는데 이와 같은 결정은 이미 훨씬 전에 했던 것이다.
근인회(槿仁會) 회원들은 각 분야에 걸쳐서 눈부신 활약을 계속해 왔다. 그러던 중 6․25사변이 발발하자 15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들이 어찌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어 답답하다.
그 후 정성장(鄭聖障)․김광서(金廣瑞)․김현규(金賢奎)․노병림(魯炳林) 형 등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백창기(白昌基) 형은 브라질로, 손의석(孫宜錫)․이영희(李榮熙) 형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정두영(鄭斗永) 형이 훨씬 후에 미국에 거주하는 자녀들과 합류했다. 즉, 8명의 동기생이 해외로 진출하였다.
슬픈 소식도 있다. 이성수(李聖洙), 김경동(金庚東), 김동섭(金東燮), 김순영(金淳永), 정영수(鄭永銖), 신동훈(申東薰), 김기홍(金箕洪), 홍용근(洪龍根) 형이 유명을 달리했고, 근년에는 정두영(鄭斗永), 서병설(徐丙卨), 이세욱(李世郁), 김정근(金正根), 그리고 김원필(金源弼) 형이 뒤를 따랐다.
이성수(李聖洙) 형은 해방 후 가장 먼저 도미하여 코넬대학에서 병리학, 특히 암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차분하게 이 분야에서 공적을 쌓아 올렸을 것이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즉각 귀국하였다. 전쟁이 터지면 피하려는 것이 일반적 심리인데 이(李)형은 이와는 반대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李)형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자라고 할 수 있다. 귀국 후 얼마 안되어 부산에서 장티푸스로 고생하던 이(李)형의 모습이 생각난다. 암학자인지라 발암물질이 있다 하여 정종이다 단무지 등을 철저하게 삼갔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니 아이러니컬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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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인회 망년회 (1975. 12.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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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李)형을 보내는 영결식(永訣式)에서 조사를 읽었다. 조사 중 '거목(巨木)은 가고 잡초만 무성하다'고 표현한 말이 머리에 남는다고 말해 주는 학우들이 지금도 있다. 1989년 11월 10일, 워커힐 호텔에서 25주기 추도회가 있었다. 문하생들이 주최한 행사였다. 고인의 논문집을 보고도 그러했지만 김용일(金勇一) 교수가 보여준 '슬라이드' 영상(映像)을 보니 옛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李)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도 합격했지만 성대예과(城大予科)로 입학하였다. 자연히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뒤를 밟게 되어 상당히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비교적 만혼이었다.
그가 땅에 묻힐 때의 일이 생각난다. 국민학교에 가기 전인 어린 그의 장남에게 '너의 아버지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저 속에서 놀고 있다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장남 명식(命植)군은 그 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내과(內科) 전공의(專攻醫)가 되어 원자력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미국 샌디에고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자부(子婦)인 강신혜(姜信惠) 박사는 연세대의대 출신으로 소아과를 전공했으며, 한때 녹십자 혈우병(血友病)센터의 원장으로 일하다가 남편과 함께 도미하였다.
김경동(金庚東) 형은 대구(大邱)에서 개업 중에 타계하였다. 성대예과 때부터 고락을 함께 해온 급우였는데,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김(金)형은 대단히 진취적인 성격이었으며 스포츠에도 상당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큰 눈이 유난히 생각난다. 근인회 모임에는 가족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그의 타계를 훨씬 후에 알게 되었다. 유택(幽宅)을 방문했는데 어쩐지 쓸쓸하기만 했다.
김동섭(金東燮) 형은 구(舊) 양정고보(養正高普)를 거쳐서 성대예과에 진학하였는데, 당시에는 사립중학에서 예과에 입학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충남 예산(禮山) 출신으로 삽교(揷橋)에 있는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많은 동기생들이 구식으로 거행된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대접이 나쁘다고 트집을 잡아 행패를 부리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일제 말기에는 대한협동당(大韓協働黨) 사건에 연루되어 도피생활을 하기도 한 투사였다. 졸업 후에는 서산(瑞山)에서 양정의원(養正醫院)을 개업하였다. 예산에서 대동의원(大東醫院)을 경영하고 계시는 최익열(崔翼烈)선배의 안내를 받아 고인의 묘에 가서 인사를 올렸을 때에는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김순영(金淳永) 형은 중부경찰서 맞은편에서 개업 중에 타계하였다. 해방 후에 함께 공부하게 된 학우인데 상당한 일본통(日本通)이었다. 생존시에 개업하던 의원을 가끔 찾아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던 일이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