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수(鄭永銖) 형도 해방 후에 급우가 된 한 사람인데 다정다감(多情多感)하고 활동적인 그는 모든 학우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기도 하였다. 정치에 대한 야심도 만만치 않았다. 고향인 진주(晋州)에서 병원을 경영하였으며 외과의로서 존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진주보건전문대학을 창설하여 육영사업에도 많은 업적을 쌓아 올렸다. 근인회에 대하여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부인은 무궁무진한 레퍼토리의 주부가수(主婦歌手)이며 근인회가 열릴 때마다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간질환으로 고생하였는데, 세상을 떠는 후 고향인 진주(晋州) 근교에 안장된 그의 묘를 찾아가 꽃다발을 놓고 돌아올 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타는 심정이었다.
신동훈(申東薰) 형 역시 해방 후에 함께 된 학우이다. 함북(咸北) 출신인 그는 일본의 제4고와 경도제대(京都帝大)를 거쳐 나와 함께 있게 되었는데, 생리학의 제1인자가 되었다. 나의 뒤를 이어 서울대 대학원 교무과장, 서울의대 학장등을 역임한 바 있고 뜻한 바 있어서 정년이 되기 전에 인제(仁濟)대학으로 이적하여 학장직을 맡고 있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WHO후원으로 86년 6월 26일부터 미국을 방문하고 마닐라를 거쳐서 7월 5일에 귀국하였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신(申)형이 별세하였다는 것을 신문에서 읽었다. 삼우제 날 마석(麻石) 모란공원묘지에 묻힌 그의 묘소를 찾아서 추도하였다. 신(申)형은 생리학자(生理學者)로서의 관록과 무궁무진한 지식 그리고 건실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표현력(表現力)과 성품(性品)으로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인제대학(仁濟大學) 백병원(白病院)에 입원하였을 때 문병(問病)하곤 하였는데 언제나 그는 여전하였다. 그가 떠난 후 속칭 '손녀딸'이라고 불리우던 그의 막내 따님의 결혼식을 주례로서 진행시켰는데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찌 할 길이 없었다.
김기홍(金箕洪) 형은 고려대학을 거쳐 한양대학에서 빛나는 업적을 세우고 정년 후에도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암으로 86년 12월 5일에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일본의 히메지고교(姬路高校)와 동경제대(東京帝大)를 거쳐서 나와 한반 친구가 된 병리학자이다. 그는 헌혈운동의 선구자였다. 1969년에는 한국헌혈협회를, 75년에는 대한혈액관리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80년대에는 대한임상병리학회를 만들었다. 만년에는 학술원 회원으로서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무게있는 그의 언동은 인상적이었다. 한양대학장(漢陽大學葬)으로 거행된 장례식에는 히메지고교 동기생인 히메지 시장이 일부러 참석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기도 했다.
정두영(鄭斗永) 형은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뒤늦게 도미하여 자녀들과 합류하였는데 귀국 후에 저세상으로 갔다. 정(鄭)형은 졸업 후 보건소장직을 맡아 보건계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성동(城東) 보건소장 시절에는 우리 근인회 모임을 관내 음식점에서 갖도록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보건소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여의사인 부인과 함께 불광동에서 개업을 하기도 하였다. 점점 무기력해져 가던 정(鄭)형이 도미하게 되었다고 들었을 때에는 다소 의외라는 느낌을 갖기도 하였다. 미국생활에 관하여는 별로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귀국 후에도 별로 접촉이 없었다. 박수 갈채를 받던 그의 '봉선화'가 뇌리를 스쳐간다.
서병설(徐丙卨) 형은 1991년 6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2주기를 맞아 추모사를 썼다. 본항 말미에 전재한다.
이세욱(李世郁) 형은 1992년 4월 18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19일 자정이 지나서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이런 시각에 걸려오는 전화는 대체로 몹시 긴급하거나 불길한 내용이다. 전화를 받고 보니 이(李)형 자제로부터의 전화였다. 이(李)형이 별안간 의식을 잃게 되어 가까이에 소재한 병원으로 옮겼는데 결국 운명했다는 이야기다. 영안실이 협소하여 모시기 거북하니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옮기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李)형은 미아리 네거리 근방에서 개업을 하고 있었다. 운명하던 날도 저녁 늦게까지 환자를 보았는데, 급작스럽게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다. 자정을 넘긴 시점이어서 서울대학병원에 연락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 노력해 보겠다고만 답하였다. 원래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한 분만을 모시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 관계로 더욱 자신이 없었다. 무턱대고 서울대병원 숙직실로 전화를 했다. 젊은 사람이 받았는데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영안실과 협의해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 후 시시각각으로 진행상황을 전화로 연락해 주었다. 나는 근래에 이같이 업무에 충실한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앰뷸런스를 마련했다. 시신(屍身)을 모시고 있는 병원으로 떠났다. 도착해서 영안실로 모셨다는 등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문상하였다. 다음날 나는 '콸라룸푸르'에서 열리는 개발도상국 환경장관회의(環境長官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젊은 사람이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노(盧)씨라고 한 이 젊은이의 가상한 행위를 병원장에게 알리고 표창해 주도록 권유하였다. 나는 나대로 비서를 시켜 선물을 전달하였다.
이(李)형은 함북 출신으로 일본 제6고등학교를 거쳐 경도제대(京都帝大)에서 공부하다가 해방 후 나와 클래스메이트가 된 수재이다. 군복무를 마친 후 광주(光州)에서 개업하다가 서울로 옮겨왔다. 이(李)형이 광주(光州)에서 개업하고 있을 때, 김정진(金楨鎭) 형이 전남의대에서 학감(學監)으로 활약 중이었다. 나는 가끔 광주(光州)로 내려가서 이(李)형, 김(金)형 등과 어울렸다. 이(李)형은 언제나 다정했다. 광주(光州)가 타향인 이(李)형이었지만, 마치 자기 고향에 찾아온 사람과 같이 나를 대해주었다. 서울로 옮긴 후에도 이(李)형과의 교분은 계속되었다.
이(李)형은 실향민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38선으로 나라가 양분되자, 문자 그대로 알거지가 되었다. 의대를 졸업한 후에 그는 전남(全南) 완도(莞島)에 사는 지인을 알게 되어 그의 권유에 따라 완도(莞島) 가까이에 있는 고금도(古今島)에서 개업했다. 별로 수입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중에 6․25 동란이 발발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은 짐작할 만하다. 이(李)형은 강진군(康津郡)으로 옮겨 도립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소액이지만 봉급도 타게되었고, 6․25의 악몽을 다소는 씻을 수가 있었다.
몇 년 후 이(李)형은 광주(光州)의 김정진(金楨鎭) 형과 허 걸(許 杰) 형의 도움으로 광주(光州)에서 개업하게 되었다. 광주(光州)에 오기까지 기막힌 인생길을 걸었지만, 그래도 광주(光州)에서는 친구도 있고 개업도 곧잘 되어 어지간히 살 맛이 생겼다. 그 후 이(李)형은 60년대 말에 서울로 옮기기까지 10여년을 광주(光州)에서 지냈다. 그는 입버릇처럼 광주(光州)를 제2의 고향이라고 했다.
근인회(槿仁會) 모임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이(李)형은 그의 자질이나 실력에 비하면 화려한 길을 밟았다고 하기 어렵다. 개업의로서 일생을 마친 셈인데 자기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李)형이 고통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을 큰 복이라고 나는 믿는다. 평소의 고운 마음씨가 그에게 복을 내리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김원필(金源弼) 형은 일본 동경대학(東京大學)에서 공부하다가 함께 된 학우이다. 정열적인 인사이며 안양(安養)에서 큰 규모의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한양대(漢陽大)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93년 9월 18일 문병을 하였는데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부인의 설명으로는 1개월 전에 입원하여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평소 즐겨 쓰던 시(詩)를 모아 시집(詩集)을 출간키로 하였으며 곧 발간될 계획이었는데 결국 출간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고 만 것이다. 20년 전부터 원불교(圓佛敎) 신자가 되었으며 전재산을 원불교재단에 헌납했다고 전해진다.
홍용근(洪龍根) 형과 김정근(金正根) 형에 관한 이야기는 '믿기 힘든 일들'에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