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담(秋潭)형을 추모(追慕)한다
추담(秋潭) 서병설(徐丙卨) 형이 유명(幽明(을 달리한 지 어언 2년이 되었다. 1주기(週忌) 때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열린 UN 환경개발회의에 출장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형을 추모(追慕)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된다.
추담(秋潭)형과 필자는 참으로 인연이 깊다. 성대예과(城大豫科) 시절 추담(秋潭) 형과 나는 서대문(西大門) 천연동(天然洞)에 있었던 아래 윗집에서 살았다. 약간 경사가 있는 지역이었으나 별로 고저(高低)의 차이는 없었다. 추담(秋潭)형 댁이 위쪽이었고, 우리집이 아래쪽이었다. 등교할 때는 거의 매번 행동을 함께 하였다. 당시 성대예과(城大豫科)는 청량리(淸凉里)에 위치했으며 우리들은 전차(電車)를 이용하였다.
서대문(西大門) 네거리에서 승차(乘車)하고 동대문(東大門)에서 바꿔 탄다. 1941년에 성대예과(城大豫科)에 입학(入學)했는데, 그 해 12월 8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청량리(淸凉里) 역이 아니라 성동(城東)역에서 전차(電車)를 하차해야 했다. 거기서부터 학교까지는 걷게 된다. 신체단련의 방법으로 이런 조치를 취(取)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제(日帝)의 얄팍한 정책은 등교할 때 각반(脚絆)을 감도록 하기도 하였다.
추담(秋潭)형과 나는 전차(電車)속에서, 그리고 성동(城東)역에서부터 함께 걷는 동안에 이런 일 저런 일을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이 일과(日課)였다. 때로는 우리들의 처지를 개탄하기도 했고, 때로는 인생(人生)에 관한 2자(者) 토론(討論)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정(家庭) 생활(生活)에서도 함께 시간(時間)을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동절(冬節)에는 야경(夜警)제도가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자진하여 한팀이 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자정이 지난 후, 한시간 정도 마을을 도는 것이다. 나무막대기로 딱딱 소리를 내며 순찰한다. 시작하기 전에 두 선고 어른들에게 교대로 인사(人事)를 올렸다. 두 분 다 몹시 흐뭇해 하신다. 두 분들께서 우리 두 사람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것이 명하다. 두 분은 원래 교분(交分)이 계셨던 것은 아니다. 우리 두 사람 때문에 친교(親交)를 맺게 되신 것이다. 두 분 모두 아들 자랑에 열을 올리신 흔적을 가끔 느낄 수 있었다. 지나치게 자랑을 하다보니 상대편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선친의 말씀을 들으면 그러했을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훌륭하고 그렇게 완벽하다면 학교(學校)에는 왜 보냈느냐'고 불평하시던 선친의 말씀으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선고 어른들께서 가까워지신 것은 분명하다.
필자는 1970년 4월부터 6년 간 모교에서 학장직을 맡았었는데, 포부의 하나가 의학박물관 설치였다. 세계의 명문 의과대학을 방문해보면 본부건물 속에 박물관이 있는것을 알 수 있다. 하버드가 그렇고 동경(東京)대학이 그렇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끝에 당시 백병원장(白病院長) (현 인제대학교 총장(現 仁濟大學校 總長)) 이던 백낙완(白樂脘) 박사로부터 100 만원을 희사받아 박물관 설치를 서둘렀다. 추담(秋潭)형에게 이 일을 맡겼다. 지금은 없어진 구 본관 4층에 진열장을 마련하였다.
꼼꼼하기로 이름난 형은 물샐틈 없는 계획(計劃)을 세우고 한 가지씩 해결해 나갔다. 병리학교실(病理學敎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압권(壓卷)은 추담(秋潭)형이 손수 작성한 기생충학(寄生蟲學) 분야(分野)의 작품(作品)이었다. 어느 모로 보거나 예술작품이다. 형의 솜씨가 널리 알려진 바 있기는 하였지만 섬세한 그의 작품(作品)에 관한 인사치고 혀를 차지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박물관(博物館)에는 고(故) 윤일선(尹日善) 선생(先生)께서도 희귀품(稀貴品)을 기증해 주셨고, 몇몇 선배님들께서도 소장품(所藏品)을 보내주셨다. 지금은 병원시계탑(病院時計塔) 건물 속에 박물관(博物館)이 마련되어 있지만, 원래의 박물관(博物館)에 소장되었던 추담(秋潭) 형의 작품 등이 어찌되었는지 살펴보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다.
예과시절(豫科時節) 동기 중에는 사립중학 출신 급우가 수 명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동중학(中東中學) 출신인 추담(秋潭)형과 양정중학(養正中學) 출신인 김동섭(金東燮) 형은 전연 교련(敎鍊)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바 없는 상태였다. 필자는 공리중학 출신이어서 비교적 엄격한 교련교육(敎鍊敎育)을 받았는데, 상기 양형(兩兄)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과시절(豫科時節)의 교련교육(敎鍊敎育)을 중학시절(中學時節)에 비하면 훨씬 어수룩한 편이었다. 그래서 양형(兩兄)에게는 큰 부담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과외라는 말이 흔하기는 하지만 교련과외라는 말은 듣기 힘들다. 양형은 입학 후 얼마동안 방과 후에 교련과외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과외가 끝나면 함께 귀가할 생각으로 운동장 한구석에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던 필자에게 배속장교가 다가오더니 혼잣말 같이 한마디 한다. "세상에 집총(執銃)하고 앞으로 가, 뒤로 가도 못하다니……, 빨리 가고 싶으면 자네도 와서 같이 해!"
대한건강관리협회(大韓健康管理協會)하면 서병설(徐丙卨) 박사를 연상하게 될 정도로 추담(秋潭)형과 이 협회와는 인연이 깊다.
원래 기생충박멸협회(寄生蟲撲滅協會)가 전신(前身)인 이 협회(協會)는 기생충(寄生蟲)문제가 거의 해결되자 건강관리협회(健康管理協會)로 개칭하고 사업내용도 대폭으로 바뀌었다. 필자 자신도 한때 협회(協會)의 이사(理事)로서 형을 도운 일이 있어서 그 발전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다. 이 협회(協會)에 대한 추담(秋潭)형의 집념, 그리고 노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어느 한가지도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자신의 성격과 철학대로 협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건강관리협(健康管理協)을 만든 것이다.
영결식(永訣式)이 있던 날 건강관리협회(健康管理協會) 앞뜰에서 노제(路祭)를 모셨다. 모든 임직원이 과장없이 애도(哀悼)하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안전에 방불하다.
형(兄)이 어학(語學)의 천재(天才)였다는 사실은 주지되어 있는 일이다. 일어(日語)나 영어(英語), 독어(獨語)는 물론이고 불어(佛語)와 노어(露語)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 그는 소련인 '스크라빈'의 명저(名著) '기생충(寄生蟲) 분류학(分類學)'을 번역하는데 정력을 쏟았다. 80권(卷)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간행물인데 형(兄)이 번역한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그의 고희기념논집(古稀記念論執)에 수록하고 있다.
1989년 10월 말 기생충학회(寄生蟲學會) 창립(創立) 30주년(周年) 기념(記念) 심포지움이 열렸고, 추담(秋潭)형도 발표를 하였다. 그 때 그의 음성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검사를 받아본 결과 간암(肝癌)으로 진단되었다. 1991년 6월 10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거의 2년 간의 투병생활(鬪病生活)을 하였다. 서교동(西橋洞) 자택으로 문병갔을 때만 해도 명랑한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으며, 소연책(蘇聯冊) 번역에 전력을 다하고 있노라고 하였다.
투병생활 중에도 형(兄)은 자기 소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건강관리협회장(健康管理協會長)으로서 다부지게 일하였고, 학술원(學術院) 회의(會議)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그가 1988, 89년에 제 35대, 36대 학술원(學術院) 자연과학부회장(自然科學部會長)으로서 알찬 업적을 쌓아 올린 것을 식자(識者)들은 잘 알고 있다. 형(兄)과 필자는 함께 자연(自然) 제(第) 4분과(分科)에 속하고 있었는데, 요사이 형이 없는 분과학회(分科學會)가 필자에게는 쓸쓸하기만 하다.
훨씬 전(前) 의 일이지만 추담형(秋潭兄)과 나는 KBS 방송이 마련한 '옛날의 금잔디'라는 프로에 나가서 마음껏 회포를 풀은 일이 있었다. 확실한 년월(年月)이 생각나지 않지만 KBS 방송국(放送局)이 남산(南山)에 있었던 때이니 꽤 오래된 이야기다. 서로 비슷한 길을 걸어왔고 서로의 인생철학도 숙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야기가 대단히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담당 아나운서도 흐뭇해 했으며 몇 번이고 잘 되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예과시절(大學豫科時節), 학부시절(學部時節), 졸업(卒業) 후(後)의 일들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우리 두 사람이 옛일을 회상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한 생각이 난다. 이제는 정말로 '옛날의 금잔디'가 되고 말았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그런 만큼 추담형(秋潭兄)과 지내던 옛날 일들에 더욱 향수(鄕愁)를 느끼게 된다.
86년(年)에 추담형(秋潭兄)은 인하대학교(仁荷大學校) 의과대학장(醫科大學長)으로 봉직(奉職)하였다. 정년(停年)을 모교에서 마치지 않고 다른 학교로 전출하는 일은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형에게 인하대(仁荷大)로 옮길 것을 강력하게 권하였다. 모교에서 학장직(學長職)을 멋있게 수행한 형의 경륜(徑綸)이 새 대학(大學)을 만드는 데 지극히 소중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권유한 이유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년 전에 다른 학교로 진출하여 후진(後進)들을 위한 문을 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기도 하였다. 형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인하대의대(仁荷大醫大)를 만드는데 형(兄)이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형은 만족스럽게 실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던 일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1986년 2월부터 90년 2월까지 4년 간 학장직(學長職)에 있으면서 온ㄹ날의 인하대의대(仁荷大醫大)를 만들어 낸 것이다.
추담(秋潭)형이 위대한 학자요, 교육자였다는데 대하여는 사족(蛇足)을 붙일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오늘날 그의 학문이 사계에서 숭앙(崇仰)받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국내외에서 쌓아 올린 그의 업적이 이 사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著書)와 논문(論文)을 통하여 그간의 사정을 잘 읽을 수 있다.
형은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형의 제자들은 기생충학(寄生蟲學) 분야에서 뛰고 있다. 모교의 이순형(李純炯) 교수, 고려대(高麗大)의 임한종(林漢鍾) 교수, 중앙대(中央大)의 조승열(趙昇烈) 교수 등은 형의 대표적(代表的)인 계승자(繼承者)들이다. 그리고 형의 두 아드님은 꿋꿋하게 의학자(醫學者)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모교에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는 한편,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추담(秋潭) 형의 옛 모습과도 같다. 3 부자(父子)가 모교에서 봉직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추담(秋潭)형이 사용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형의 서재(書齋)를 지키고 계신 미망인(未亡人)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 진다. 성(聖)스럽다고 할 만큼 부덕(婦德)을 간직하고 계신 박여사(朴女史)에게 영원한 영광(榮光)이 있으리라.
형(兄)은 결코 외롭지 않다.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이다. 2주기(週忌)를 맞이하여 추담형(秋潭兄)의 명복(冥福)을 비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 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