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위생학교실의 무급조교로 남게 되었다는 것은 앞서 적은 바와 같다. 규정된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빨리 출근하여 청소를 하고 교수의 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일과였다. 교수가 강의를 할 때에는 강의실에 먼저 가서 흑판을 물로 닦고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교수가 흑판에 글을 쓰면 적당한 때에 지워야 한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중 48년 8월 어느 날, 수의대 미생물학교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규명(李揆明) 선배가 찾아와서 수의학부로 오라고 주문한다. 이(李)선배는 의과대학의 1년 선배이며 중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우리 두 사람의 선친들이 막역한 친구였던 관계로 학창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
무급조교생활도 1년이 지나고 했으니 청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며 수의학부로 오면 당장 전임강사에 위생학교실 주임교수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봉급도 탈 수 있고 행세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유혹한다. 이(李)선배는 그 전 해에 수의학부로 가서 근무하고 있었으며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했고 그곳 수의대의 교수로서 활동한 분이다. 한때 귀국하여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무과장직을 맡기도 했지만 다시 도미하였다.
동물위생학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어서 사절한다고 하였다. 며칠 후 수의학부장이었던 이근태(李根台) 박사가 찾아와서 수의학부로 올 것을 권유하였다. 같은 이유를 내세워 사절하였다. 그 후에도 두 번 찾아와서 권유했다. 이분의 정성에 못이겨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48년 10월에 수의학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수의학부는 농과대학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화동 네거리의 구(旧) 경성의전(京城醫專) 자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 동기생 중에서는 가장 빨리 전임강사로 임명된 것이며 약속된 대로 주임교수의 보직을 맡기도 했지만 동물위생학(動物衛生學) 교실(敎室) 이라고 해봐야 나 혼자만이 있었으니 외로울 때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수의학부는 수복 후의 53년 4월 20일 수의과 대학으로 승격하였다.
당시 수의학부의 교수진용이 충분치 못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근태(李根台) 학부장, 김용필(金容珌) 교무과장, 홍병욱(洪丙旭) 동물병원장 외에 전기한 이(李)선배가 미생물학을, 오순섭(吳順燮) 교수가 해부학과 수의사법규를, 윤쾌병(尹快炳) 교수가 병리학(病理學)을, 김형록(金炯祿) 교수가 생리학(生理學)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외래강사에 의존하는 부분도 많았다.
교양분야의 교수는 전무하였으며 몇몇 외래강사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동물위생학강좌와 철학개론강좌를 담당하였다. 두 분야가 나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의 사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물위생학의 경우에는 미국원서나 일본 참고서를 구해서 번역을 하여 강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철학 강의는 대학 예과 때 들은 것과 장서 중에서 몇 가지를 자료로 사용하였다. 학생들은 대단히 수준이 높았다. 구(旧) 수원고농(水原高農)은 일제 시에 대단히 우수한 전문학교였으며 한국인에게는 입학하기 힘든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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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 앞줄 왼쪽부터 김정진, 정두영, 뒷줄 왼쪽부터 박찬무, 강처용, 제형과 필자 (1947. 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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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학생으로는 1회 졸업생인 이장락(李長洛), 김교현(金敎賢), 이방환(李芳煥), 이정재(李正載), 2회 졸업생인 조병률(趙炳律), 윤석봉(尹錫鳳), 3회 졸업생인 정창국(鄭昌國), 김상남(金相男) 박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쟁쟁한 분들이었으며 후에 수의학계를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이장락(李長洛) 박사는 수의약리학의 권위로서 모교의 학장직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독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바 있는 '스코필드'박사와 각별한 사이이며 전문분야의 저서와 더불어 '스코필드'박사에 관한 전기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교현(金敎賢) 박사는 남성다운 기질에 모험을 좋아했다. 나에게는 중학교 후배이기도 하며 언제나 서슴없이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민 가서 활약하였는데 객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이방환(李芳煥) 박사는 일본의 동경수의학교(東京獸醫學校)에서 공부하다가 해방 후 합류하였다. 전북(全北)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전남(全南)대학교로 옮겨 1990년 2월에 정년퇴임하였다. 이정재(李正載) 박사는 미군 수의부대에서 수의사 겸 통역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최고 문관이었다. 후에 도미하여 L.A.에서 공중위생관(公衆衛生官)으로 국위를 선양하였다.
조병률(趙丙律) 박사는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연구하고 교수생활을 하였으며 정년 후에는 명예교수로서 계속 수의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윤석봉(尹錫鳳) 박사는 해부학의 권위이며 모교의 교수로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정창국(鄭昌國) 박사는 외과교수로서 모교에 남아서 교육사업에 진력하였으며 학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89년 2월에 정년퇴임하였다. 김상남(金相男) 박사는 학생시절부터 영어 실력이 대단했으며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연구하였으며 Park Davis제약회사에서 독성 검사업무를 담당하고 많은 업적을 쌓고 있다.
이들은 나와는 연령상 별로 차이가 없었지만 깍듯이 사제지간의 예의를 지켰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이지만 우의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번은 동물위생학 강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조병률(趙炳律) 군이 질문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강의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는데 번역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아닌 조언이었다. 강의종료후 교수실로 돌아가서 원본을 보니 번역을 잘못한 것임을 알았다. 다음 시간에는 물론 정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름대로 강의시간을 메꾸고 지나갔는데 부임 후 얼마 안가서 이근태(李根台) 부장이 농림부(農林部) 축산국장으로 전출되고 김용필(金容珌) 교수가 부장으로 취임했다. 김(金)교수는 자신의 후임으로 나를 교무고장에 임명하였다. 서울대학교 내에서 가장 젊은 교무과장이 된 것이다.
교무과장 회의는 언제나 동숭동(東崇洞) 대학본부건물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고소를 금할 수가 없다. 회의시간에 맞추어 입실했다. 당시 의과대학 교무과장은 이제구(李濟九) 교수였는데 나를 보고 어째 왔느냐고 물으신다. 교무과장 회의에 참석하러 왔다고 하였더니 어느 분의 대리냐고 한다. 내 자신이 교무과장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