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학부(獸醫學部)는 비교적 조용했다. 가끔 찾아가서 김용필(金容珌) 부장을 만났다 .김(金)선생은 조금만 참으면 반드시 좋은날이 온다고 귀띔해 주셨다. 김(金)선생은 고성능 라디오를 숨겨두고 청취했는데 조만간에 미군이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중 9월 초의 어느 날 신상에 일대 변화가 생겼다. 수의학부에 나와 있던 김형록(金炯祿) 교수와 내가 북한군에게 끌려간 것이다.
집결장소는 동숭동 소재의 구 서울대학교 총장공관이었다. 당시 나는 30세 전이었는데 가서 보니 젊은 사람은 김(金)교수와 나 정도였다. 의학 출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밤이 되는 것을 기다리다가 60명쯤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북으로 향했다. 녹번동을 지나서 간 것으로 기억된다. 대열의 좌우에는 다발총을 가진 북한군들이 붙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낮에는 산속에서 쉬고 밤에만 걸었다. 쉴새 없이 생각나는 것은 한 돌이 되기 전인 장녀 인택(仁澤)의 놀란 얼굴과 어쩔 줄 모르는 집사람의 얼굴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디로 끌려가지나 않았을까 근심과 걱정이 언제나 앞섰다.
일행 중에 낯익은 사람은 없고 누구든지 별로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서로 속을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한 사람을 사귀었다. 김(金)씨라고만 생각날 뿐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철도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지리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였다. 이분으로부터 우리가 가고 있는 지리 설명을 가끔 들었다.
어느 날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제 말기에 도망쳐서 생활하였던 사입장(舍入場) 근방에서 쉬게 되었다. 김(金)선생은 이 지역의 지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출발할 무렵에 도망칠 것을 김형록(金炯祿) 교수와 약속하였다. 변소에 가는 척하고 뒷산으로 피신했다. 약속한 대로 김(金)교수도 뒤따랐다.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꼭 숨어 있었다. 어둠속이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일행은 떠났을 것으로 짐작했다.
두 사람은 산을 타고 남하하기로 합의했다. 낮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길을 걷는 것도 삼가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문제는 식량이었다. 해결할 길이 막연했다. 어떤 지역이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다음날 새벽 산속에서 민가를 발견했다. 멀리서 살펴보니 근처에는 다른 민가가 보이지 않았고 사람의 왕래(往來)도 보이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이 집으로 갔다. 노부부였는데 의외로 친절하게 맞이해주었다. 북으로 가는 길인데 길을 잃었다고 했더니 고생이 많다고 위로해 주었다.
아침 대접을 잘 받았다. 배불리 먹고 지리에 관해서 설명도 들었다. 시장할 때 들라고 먹을 것을 꾸려주기도 했다. 한없이 고마운 노인들이었다. 집에서 나와 또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생활이 되풀이되었다. 산속의 민가는 평화스럽고 친절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식량문제가 잘 풀렸다.
지리를 몰랐던 관계로 북으로 가는 길을 남으로 가는 길로 착각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산속의 민가에는 젊은 사람은 없었고 노인들 뿐이었는데 이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우리들이 어디를 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순박한 노인들이기는 하지만 남하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고 임무를 마치고 북상한다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구실이었다.
이렇게 지내오던 어느 날, 멀리서 내려다보니 북한군이 삼삼오오 북으로 향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리 두 사람은 바싹 몸을 숨기고 살펴보았다. 만약에 발견되는 날이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무엇인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휘계통도 서있지 않은 것 같았다. 패잔병인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한없이 기뻤다. 이제까지 오는 동안에 다투기도 했다. 나는 이쪽으로 가자하고 김(金)교수는 저쪽이 옳다고 고집하기도 했다. 피곤에 빠진 두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고집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모습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많은 북한군들이 북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것도 새로 맹세했다. 경거망동은 삼가 해야 한다고 서로 다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꿈이었다.
간간히 폭격도 있었다. U.N군의 인천상륙은 알 수 없었지만 여러 가지 양상으로 보아 국군이 북상 중이라는 심증(心證)이 굳어졌다. 머지않아 국군을 만나게 되겠지 하고 참을 때까지 참아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결국 감격적인 그 날은 찾아왔다. 그 때의 그 감격과 해방 후의 태극기를 단 한국군을 만났을 때의 감격이 나에게는 영원한 것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