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임한 후에 영입한 분으로는 고광욱(高光昱) 박사가 있다. 51년에 서울의대를 졸업하자마자 계속해서 권유한 끝에 결국 나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소아과(小兒科)를 담당한 고(高)박사의 실력은 대단했으며 당시 미 제9군단 의무부에 배치되어 있었던 하이너(Douglas C. Heiner)중위가 홀딱 반하여 1주에 두 번씩 꼭 내원(來院)해서 고(高)박사를 도왔다. 두 분이 다 일밖에는 모르는 인사였다.
하이너 박사는 펜실베이니아 의대 출신으로 하버드대학병원의 하나인 보스턴 소아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있던 중에 입대하여 파견된 분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고광욱(高光昱) 박사는 56년에 하이너박사의 초청으로 보스턴 소아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고(高)박사가 이 병원에서 일하게 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고(高)박사의 훌륭한 업적을 계기로 보스턴 소아병원은 한국인에게 조금씩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춘천시절(春川時節)에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일이 있었다. 장남이자 외아들인 윤택(允澤)이가 52년 2월 17일 춘천(春川)에서 태어난 것이다. 장녀인 인택(仁澤)이는 부산(釜山)에 있었고 춘천(春川)에서는 장남을 얻게 된 것이다. 빙장어른께서 장문의 축하 편지를 ㅗ내주신 일이 지금도 고맙기만 하다.
춘천시절(春川時節)에는 생각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일일이 적을 수는 없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에틸 알코올로 술을 만들어서 마시던 일이다. 창고(倉庫)에는 에틸 알코올이 상당히 저장되어 있었다. 당시 군의관(軍醫官)으로 근무하던 주변의 친구들 중에 이 재미를 맛보지 않은 분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주정균(朱鼎均) 소령(小領), 김해석(金海錫) 중위(中尉), 백영한(白永漢) 소위(少尉), 구도서(具燾書) 소위(少尉) 등 많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52년 가을 민사처병원(民事處病院)이 춘천(春川)에서 포천(抱川으로 이동하였다. 천막 대신 퀀셋으로 병사(病舍)가 건립되어 훨씬 병원다웠다. 포천읍(抱川邑)이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지방 도시였지만 군사관계로 교통은 상당히 붐볐던 것으로 기억난다.
포천읍(抱川邑)에서는 명문가였던 김칠동(金七東) 씨 댁을 원장사택으로 쓰고 그 앞뜰에 병원을 세웠다. 민사처장과 차장도 새 얼굴로 바뀌었는데 두 분이 다 같이 나에게는 지극히 친절했다. 특히 차장이었던 아이비 소령은 심심치 않게 내원(來院)하여 일을 도와주었다.
군단본부(軍團本部)는 차편으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가끔 군단장인 젠킨스 장군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젠킨스(Reuben E. Jenkins)장군은 인자한 삼성장군(三星將軍)인데 필자를 무던히 보살펴주었다. 계급이 높으니 누구도 그 옆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외로운 것이다. 계급이 없고 군번이 없는 나는 젠킨스 군단장의 벗이 되기 일쑤였다. 계급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장군의 입장에서는 나를 대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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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제9군단 민사처 직원들과 함께 춘천에서 (1951. 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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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봄으로 생각되는데 미국의 스펠만 대주교가 내한하여 제 9군단을 방문하였다. 스펠만 대주교가 어떤 분인가를 알 길이 없지만 고집 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그를 정중하게 맞이하였다는 후문이니 상당한 분인 것만은 틀림없다.
연락을 받고 군단장실로 갔다. 젠킨스 장군의 소개로 대주교에게 인사를 했다.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병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X 선(線) 촬영기라고 답하였다. 사실 X 선(線) 촬영기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불편이 있었다. 알겠다고 하며 선처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약 한 달이 지난 후 스펠만 대주교로부터 1만불이 군단장 앞으로 송금되어 왔다. 그 당시 1만불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군단장은 의무부장이었던 단랩프 대령과 나를 불러 대책을 강구토록 지시하였다. 솔직히 말해 나에게는 X선(線)기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 단랩프 대령에게 일임했다. 랩프 대령은 의무부의 참모들과 상의한 끝에 일제 X선(線)기를 수입하기로 결론지었다.
수개월 후에 X선(線)기가 도착하였다. 퀀셋의 출입문은 이 기계가 통과할 만큼 크지 못해서 출입문을 뜯고 기계를 넣어 설치한 다음 다시 문(門)을 다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은 물론 공병대(工兵隊)가 맡아서 하였다. 나는 X선(線)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당시 한전병원(韓電病院)에서 근무 중이던 김태식(金泰植) 기사(技士)를 데려왔다. X선(線) 과장(科長)이었던 김정진(金楨鎭) 박사에게 부탁해서 이 일이 성사되었다.
X선(線)기가 설치되고 배선(配線)도 완료되고 하여 단랩프 의무부장(醫務部長) 임 석하에 가동시험도 끝냈다. 이제는 X선(線)기 증정식 차례가 남았을 뿐이다. 확실한 일자가 기억나지 않지만 증정식 날 아침의 일이다. 수위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X선(線) 촬영기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뛰어 나가 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문은 그대로였다. 어떻게 감쪽같이 기계가 문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증정식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허둥지둥하고 있으니까 헬리콥터가 가까이 오고 있다. 약속대로 식이 시작되기 30분 전에 단랩프 대령(大領)이 온 것이다. 마중 나가서 인사를 하자마자 X선(線) 촬영기가 없어졌다고 보고했다. 단랩프 대령은 농(弄)이 지나치다면서 어깨를 툭툭 친다. X선(線)기가 설치되어 있는 퀀셋으로 안내했더니 단랩프 대령(大領)도 깜짝 놀란다. 얼마 동안 멍하고 있더니 저질러진 일인데 어찌 하냐며 낙심(落心)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고비를 넘길 것을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식이 시작되기 5분(分) 전 쯤 헬리콥터 2대가 도착했다. 군단장(軍團長)과 공병감(工兵監)이 온 것이다. 이에 앞서 군수(郡守)와 서장(署長)도 와 있었다. 나와 단랩프 대령(大領)이 젠킨스 장군(將軍) 앞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단랩프 대령(大領)이 도난사건(盜難事件)을 보고했다. 군단장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분 역시 대단한 장군이었다. 대신 기기를 마련해 줄 터이니 너무 걱정 말라면서 돌아갔다. 그 후 도난 된 것보다는 훨씬 크지만 중고기기(中古器機)가 입수 되었다.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감지덕지할 따름이었다.
한편, 경찰(警察)에서는 연일 수색을 했다. 그러나 단서조차 잡을 수 없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생애(生涯)를 통해서 가장 해괴했던 일이 바로 이 도난사건이었는데 지금도 이 수수께끼는 풀길이 없다.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