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처(法制處)에서 일이 잘 풀리던 날 저녁에 명(明)학장께서 만찬을 베푸셨다. 어지간히 취기가 돌았다. 박(朴)국장께서는 나에게 몇 회 출신이냐고 물으신다. 1회라고 답하였다.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보고 명(明)학장은 1회라고 해서 다 같은 1회냐고 하신다. 명(明)학장은 구(舊) 성대(城大) 1회(回)이고, 나는 서울대(大) 1회(回)인 것이다. 두뇌회전이 빠르신 박(朴)국장이 왈칵 화를 내신다.
선배를 속였다고 호되게 꾸지람하신다. 선배라고 사칭한 일이 없다고 하니 더욱 화를 내신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박(朴)선배와는 무던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법문학부(法文學部) 출신이기는 하지만 박(朴)선배가 나에게는 대학의 3년 선배이다. 후배인 나는 선후배 관계를 알지만 선배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한 수가 많다. 박(朴)국장은 후에 법제처장(法制處長),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 명지대총장(明知大總長), 대한교연회장(大韓敎聯會長) 등을 거치신 바 있는데 이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가가대소(呵呵大笑)하게 된다.
또 하나의 난관을 통과해야 했다. 얼마 안 되는 예산이었지만 국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국회의 어느 위원회에 출석하였는지 분간이 되지 않지만 아마도 문공위원회(文公委員會(의 예산심의소위(豫算審議小委)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몇 분 안 되는 국회의원이 모였는데 도대체 보건대학원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무엇 때문에 만들려고 하느냐 등 질문이 나왔다. 어떤 분은 조교수란 직책도 강의할 수 있느냐, 어째서 윗사람도 있을 터인데 조교수밖에 되지 않는 자가 나왔느냐 등 질책조로 꾸짖는 분도 있었다.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 조그마한 예산이기는 하였지만 얻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소정의 절차를 마친 셈이다. 후일담(後日談)이지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아무 말씀 없이 재가하셨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부하신 어른인 까닭에 보건대학원에 관하여는 어느 분보다도 이해가 많으셨다고 듣고 있다. 대망의 보건대학원 설치에 관한 대통령령(大統領令)이 제1430호로 1959년 1월 13일에 공포되었다. 관계인사 여러분, 특히 짚차를 쓰게 해 주시고 신세진 분들에게 식사대접을 아끼시지 않으셨떤 명주완(明柱完) 학장에게는 지금도 머리가 숙여진다.
5월 2일에 개강하였는데 제 1회생으로는 김석근(金碩根). 김좌상(金佐相), 김학영(金學泳), 박남영(朴南永), 안상경(安商璟), 양용진(梁龍瑱), 류석환(劉錫煥), 임동순(任東淳), 전남호(全南昊), 정문식(鄭文植), 지상구(池商九), 이동목(李東穆), 김준제(金俊堤), 김수선(金壽善), 유명현(柳明鉉) 외 2명 등 17명이 입학하였다. 이 중 11명만이 다음해 3월에 제1회 졸업생으로서 졸업하였다. 그 당시 보건대학원에는 단일학과로서 보건학과가 설치되었었는데 이 학과에는 8개 전공이 있었다. 수업연한은 1년이었다. 모든 것은 미네소타 보건대학원을 그대로 본 땄던 것이 생각난다.
초대 원장으로는 명주완(明柱完) 의대학장(醫大學長)이 겸임하셨고, 초대 교무과장으로 김인달(金仁達) 교수가 취임하셨다. 명(明)원장께서 60년 6월까지 원장직을 맡으시고 후임으로 김인달(金仁達) 선배께서 취임하셨다. 김(金)원장께서는 10여 년 동안 원장으로서 보건대학원 발전에 헌신하셨다.
표방하는 원시(院是)는 대단하였지만 현실적인 여건은 그렇지 못하였다. 보건대학원이 사용한 강의실을 살펴보면 그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현보건대학원 건물은 1970년 1월에 완공되었는데 그때까지 보건대학원은 문자 그대로 곁방살이를 한 것이다. 현재 건물은 고(故) 김인달(金仁達) 원장(院長)이 노력하셔서 CMB의 원조로 건축된 것이다.
지금도 1959년 5월 2일에 의대 3층 대강당에서 거행된 성대한 개원식의 광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문교부장관을 비롯한 여러 국내외 손님들로 식당이 메워졌고 모든 분이 보건대학원의 출범을 축하해 주었다. 전 보건대학원장인 정문식(鄭文植) 박사가 학생 대표로서 선서하던 모습도 회상된다. 개원식에 이어서 축하 리셉션이 있었는데 산업의학의 원로이신 최영태(崔永泰) 선배께서 주신 조언이 지금도 생생하다. 앞날의 골치 아픈 일들이 걱정된다는 것과 이왕에 탄생한 대학원이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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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보건대학원 제1회 졸엄기념 사진 / 보건대학원장을 겸직하신 명주완 의대학장, 김석환 의대교수, 김인달 보건대학원 교무과장이 보인다. 나는 이날 본부 졸업식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 3.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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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의 보건대학원은 의과대학(醫科大學)에 예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장과 원장이 동일인(同一人)이고 교수진도 김인달(金仁達) 선생과 내가 겸직하는 정도였고 외래강사에 많은 시간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건대학원이 출범한 후의 당면과제로서는 첫째가 강의실의 확보였고 둘째가 전임교수의 확보였다.
전자에 관하여는 앞서 적은 바와 같이 1970년까지는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길을 걸어야 했다. 후자에 있어서는 장차 교직을 맡을 젊은 사람들을 미네소타 보건대학원으로 파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인재발굴은 언제나 중요한 과제인데 이 목적을 위해서 박향종(朴享鍾), 고응린(高應麟), 최능원(崔能元)씨 등이 선발되었다.
허정(許程) 박사와 고응린(高應麟) 박사는 의대졸업 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기초의학요원으로 대학에 파견 근무 중이었는데 장차 보건대학원의 교수요원으로 지목되어 미네소타 보건대학원으로 파견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복무 중이어서 이 일이 간단치 않았다. 당시 육군의무감(陸軍醫務監)이던 정희섭(鄭熙燮) 장군(후에 보사부장관.保社部長官)과 대통령 법률비서관이던 이원희(李元熙) 선생의 노력으로 미네소타 보건대학원의 개강일에 맞추어 겨우 도미하게 되었다. 이원희(李元熙) 선생은 구 성대(城大) 의학부(醫學部) 7회 출신이신 고(故) 이주희(李周熙) 박사의 백씨(伯氏)이며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는데, 이(李)박사의 조언이 크게 작용한 것은 물론이다.
최능원(崔能元) 박사는 학생시절에 사병으로 군복무를 필하였던 관계로 도미하는데 지장이 없어 이들보다 두 달 앞서서 미네소타에 파견되었다. 다음해 즉 1960년에는 박향종(朴享鍾)박사가 파견되었다. 박(朴)박사는 후에 카톨릭대학으로 전출한 이승한(李昇漢) 박사 등과 더불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 1기생으로 보건학과정을 밟은 10명 중의 한 분이며 서울의대 예방의학교실에서 조교로 근무 중이었다.
이렇게 해서 박향종(朴享鍾), 허정(許程), 고응린(高應麟) 박사 등이 보건대학원의 핵심교수요원으로 김인달(金仁達) 선생을 정점으로 활약하게 되었는데 최능원(崔能元)박사는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한 후 캐나다로 이주하여 현재 마니토바(Manitoba) 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10여년간 원장으로서 보건대학원을 키워주신 김인달(金仁達) 선생께서는 이미 고인이 되셨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새삼 명복을 빈다.
김인달(金仁達) 선생의 후임으로 72년 1월에 취임하신 심상황(沈相煌) 선생께서는 2개월여 만에 타계하시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다. 그 뒤를 이어 고응린(高應麟) 박사가 72년 3월부터 8개월에 걸쳐서 원장 직무대리로 일하다가 한양대학교로 전출하였다. 예방의학교수로서 한양대학 병원장직이 된 후 의료원장직을 거쳐 의대학장으로 활약 중이다.
박향종(朴享鍾) 박사는 72년 8월부터 4년 동안 원장직을 맡은 후 한국보건개발연구원장(韓國保健開發硏究院長) 등의 요직을 거쳐 세계은행,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등에서 활약한 바 있고 그 후 인제(仁濟)대학교 부총장 겸 보건대학원장으로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허정(許程) 박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건행정학의 권위자로서 원장직을 78년 4월부터 4년 간 맡은 바 있으며 대학사회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 대하여도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중이다. 허(許)원장 후임으로 의대의 홍창의(洪彰義)교수가 2년간 복무했으며 84년 4월부터 4년간 김정근(金正根) 교수가 원장직을 수행하였다. 김(金)교수는 일본 동경대학(東京大學)에서 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인류생태학(人類生態學)을 우리나라 보건분야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88년 4월에는 정문식(鄭文植) 박사가 제16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다대한 업적을 쌓은 바 있고 1992년 4월부터 김정순(金貞順) 박사가 그 후임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는 61년 10월부터 66년 2월까지 보건대학원에서 교무과장직을 맡았고 76년 4월부터 2년간 제10대원장으로 근무한 바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6개의 보건대학원이 있는데 그 중 전임교수에 의해서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곳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뿐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걸어온 길은 곧 우리나라의 보건계가 겪은 일들을 대변해준다고 하겠는데 따지고 보면 공중보건원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보건학과정이 그 모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