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당시 나는 서울의대(醫大) 조교수(助敎授)였는데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5월 16일, 아침 강의를 하기 위해 보건대학원 강의실로 갔다.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니까 학생 중 한 사람이 다가와서 강의를 하겠느냐고 묻는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군사정변(軍事政變)이 일어날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당시 학생 중에는 소령(少領) 한 분을 비롯하여 4명(名)의 현역장교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강의를 그만두기로 하고 예방의학교실 연구실로 돌아왔다.
당시 보건대학원은 현재 의대실험실이 위치해 있었던 구(舊) 보건진료소(保健診療所) 건물을 사용 중이었다. 나는 삼선동(三仙洞)에 살고 있었던 까닭에 전연 총소리 같은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연구실로 돌아와서도 별로 평상시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였다. 군사정변이 일어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오전 중이라고 기억되는데 낯선 대위(大尉) 한 사람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권총을 차고 있으며 표정도 굳어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도 상당히 긴장하게 되었다. 잠시 동행하자고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가보면 안다는 대답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무엇인가 잘못이 있어서 연행당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무엇 때문이냐고 했더니 역시 가보면 알게 된다는 대답이었다.
지프를 타고 가는데 별로 죄인(罪人)을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래도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심정이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보니 남산(南山)아래에 있는 KBS건물이었다. 지금은 여의도로 옮겨 갔지만 당시에는 남산(南山) 밑에 있었다.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 갔다. 어떤 방이었는지 지금은 분명치 않은데 들어가 보니 보사부(保社部)의 김용성(金容聖) 과장(課長)이 먼저 와 있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둘이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대령(大領) 한 분이 오더니 이제 혁명과업(革命課業)을 성취해야겠는데 두 사람이 이를 위해서 대담형식으로 방송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잠시 후 방송실로 안내되었다. 두 사람은 대화의 내용에 관하여 의견교환을 할 사이도 없이 곧 방송을 시작하였다.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모든 사람의 건강이 전제조건으로 되는 것이며, 건강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하여 배전(倍前)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특히 여름철의 위생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할당된 시간이 얼마였는지 확실한 기억이 없으나 15분을 넘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용이 좋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연구실로 돌아갈 때에는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수고하였다는 인사도 들었고 지프에서도 따뜻하게 예우를 받았다. 연구실에 도착해서 생각해 보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5·16혁명의 성공 여부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연구실에는 라디오가 없었고 라디오를 청취하려면 대학로(大學路)에 있는 학림다방(學林茶房)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림다방(學林茶房)과 중국음식점(中國飮食店)인 진아춘(進雅春)은 의과대학(醫科大學)이나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學)의 교수나 학생들이 가장 애용하는 장소였다.
학림(學林)다방에 가서 라디오를 들으니 동원된 군인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매구루더'대장의 성명이 되풀이 낭독되고 있었다. 미(美)8군사령관(軍司令官)인 동시에 UN 군사령관(軍司令官)인 '매구루더'장군의 명령이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심경이 어떠했겠느냐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
최고회의(最高會議)가 구성되고 내각도 발표되었다. 초대 보사부장관(保社部長官)으로는 장덕승(張德昇) 장군(將軍)이 임명되었다. 장(張)장군은 나의 중학과 대학의 7년 선배였다. 당시는 공군의무감(空軍醫務監)이었다. 참으로 어진 분이었으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였다. 말이 적고 예의바르며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러면서도 위엄이 있어서 그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군참모총장(空軍參謀總長)을 역임한 장덕창(張德昌) 장군과는 형제지간이다.
그런데 장 장관(張 長官)이 나에게 차관(次官)을 맡아달라는 전갈이 왔다. 나는 펄쩍 뛰었다. 군 출신이 아닌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장(張)장관은 내가 예방의학교실(豫防醫學敎室)에서 모시고 있던 김인달(金仁達)선생과는 경성제대(京城帝大) 동기생으로 막역한 사이였기에 김(金)선생에게 나의 입장을 잘 설명해 주십사 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며칠 후 당시 의대학장(醫大學長)이시던 라세진(羅世振) 교수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기꺼이 차관으로 가라는 분부이시다. 장(張)장관은 같은 뜻을 당시 서울대총장(大總長)이시던 신태환(申泰煥)박사에게도 전하신 것으로 듣고 있다.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바가 많았지만 선배님들의 뜻에 따를 것을 작심하였다. 지시된 사흘 후가 되면 발령될 것이라는 전갈이 있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 많다. 이력서를 제출한 다음 날 새벽 보사부(保社部)에 근무하고 있는 이(李)모씨가 집으로 찾아왔다. 차관(次官)으로 오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이야기다. 그런 일 없다고 하니까 다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시치미를 떼느냐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장기간에 걸쳐 복무를 하였는데 별로 빛을 보지 못하였으니 차관으로 취임하게 되면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삼 일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답답해졌다. 그러던 중에 신문은 장(張)장관이 예비역으로 전역하였다는 보도를 한다. 다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장(張)선배는 장관직을 물러났다. 차관(次官)도 써보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이다.
퇴임 후 연구실로 나를 찾아오시더니 참으로 미안했다며 엉덩이를 내밀며 때리라고 하신다. 참으로 훌륭한 선배이다.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이 있었지만 어찌해서 장관직을 물러나게 되었는지는 일언반구 말씀이 없었다. 직접 들은 이야기도 아니고 진부(眞否)를 가릴 길도 없는 일이지만 모측의 모략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이다. 소문인 즉 장(張)선배와 신의주(信義州) 출신이고, 당시 좋게 보이지 않았던 장(張)모씨와 관계가 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사실무근임이 밝혀져 박정희(朴正熙) 최고회의의장(最高會議議長)의 위로를 받고 원하는 자리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장관을 거친 사람은 갈 곳이 마땅치 않다. 걸맞은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장(張)선배가 적십자병원장(赤十字病院長)으로 부임하게 된 정확한 뒷이야기는 모르지만 얼마쯤이라도 추측은 가능하다.
1961년도 저물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게 되면 학년 말도 다가오게 된다. 학년 말이 되면 대학사회에서는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학위수여이다. 당시에는 대학원에 연구생제도가 있어서 대학 외의 직장에서 일하는 인사에게도 학위취득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에서도 몇 사람의 학위취득자가 배출되었다. 대학의 각 교실에서도 이러한 경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위취득자가 배출되면 자축(自祝) 타축(他祝)의 모임이 벌어진다. 내가 속해 있던 예방의학교실(豫防醫學敎室)에서도 수 명의 취득자가 탄생했다. 김인달(金仁達) 선생(先生)과 교실원들 그리고 취득자가 어울려 2차(次), 3차(次)까지 이어졌다. 2차(次)로 갔던 곳이 명동(明洞)의 '아모래'바였던 것이 생각난다. 어지간히 취한 상태였다. 이 술집에 가보니 장(張)선배를 중심으로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의 간부와 학위취득자가 기분을 내고 있었다. 어지간히 마신 모양이다. 우리들을 보고 같이 한잔 하자고 한다. 특히 장(張)선배께서는 나를 보고 반가워하셨다. 마음껏 마시자고 하신다.
얼마 동안이나 함께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각각 3차(次)로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장(張)선배를 뵌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은 몰랐다. 장(張)선배는 그날 밤 만취되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렇게도 인자하시고 근엄하시며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던 장(張)선배가 이렇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만일에 장(張)선배가 장관직을 오래 맡으셨다면 나도 싫든 좋든 간에 차관직을 맡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인생이나 운명에 대하여 고소(苦笑)를 하며 야릇한 느낌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