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장으로 취임한 후 3개월이 지난 7월에 학장보고서(Dean’s report)를 발표했다. 말하자면, 학장으로서의 포부와 계획을 알린 것이다. 외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리 경우는 아직 생소했다. 그만큼 이 발표에 대하여는 많은 분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매월 한 번씩 학장의 날(Dean's day)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학장의 날'은 학장과 학생 대표들과의 대화가 주된 내용이다. 학생들의 불평이나 불만, 희망사항 등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물론, 관계교수들도 참석하여 이 모임을 살찌게 하였다. 다음의 학장보고서를 소개한다.
①학장보고서(學長報告書)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은 인류를 공간적인 존재에서 시간적인 존재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 숨이 가쁜 경쟁의 와중(渦中)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한 우리나라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미처 습득하지도 못한 채 공간적인 존재로서의 비극을 극복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밖으로는 국제음모의 상존하는 위협이 가중일로에 있고 안으로는 자립(自立)이라는 민족적 지상명제를 안고 번영과 복지에로의 발돋움이 한창이다.
사회구조의 미분화(未分化)로 인한 복잡성은 전문적인 기능의 분화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증대된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대학의 실천적 사명을 강력히 재촉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처럼 우리 의과대학은 역사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중요한 시점에서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할 중책(重責)을 부여받고 있다. 20세기의 과학의 발달은 우리가 의심할 정도로 경이적인 것이었다. 이론과 기술의 현란한 진보는 인류의 달 착륙이라는 장거(壯擧)와 심장이식(心臟移植)의 기적을 연출케 함으로써 신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뉴턴의 '중력(重力)의 법칙'이나 하베이의 '혈액순환이론(血液循環理論)'의 발견은 그 당시의 철학자나 의학자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으나 대부분 사람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못 되었다. 그러나 양자이론(量子理論) 및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의 발견은 지구를 흔들었고 장기이식(臟器移植)의 성공은 전 세계 인류를 흥분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 그것은 진보된 지식의 총화가 이루어 놓은 개가(凱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간의 관심영역의 확장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류가 동시성(同時性)을 자각한 시각적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지구의 인류는, 그리고 우리 민족은 우리 의료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어떻게 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의학이 고도로 발달 성장을 거듭함에 따라 수많은 문제점이 노출된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은 회의에 찬 질문을 던진다. '인류를 위한 의학'을 보다 창조적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일까? 발달된 의학의 이론과 기술이 때때로 인류의 장래에 암영(暗影)을 던진 참상을 빚었을 때 사람들은 의학을 저주하고 비난했다. 인간 능력의 장쾌한 승리인 장기이식이 성공했을 때 경탄의 박수갈채 속에는 회의와 깊은 우려의 물결이 파동치기도 했다.
폭증하는 인구가 제기한 문제에 의학이 지대한 공헌을 했을 때, 유전인자의 일부 구조를 밝힘으로써 생명 창조의 신비에 도전한 용기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일부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전복하고 신성한 영역을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어리석은 기우에 불과하다. 그것은 학문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영역이 협소하고 깊이가 천박하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류와 그의 미래는 그토록 파괴적이거나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진보에의 부단한 의지로 보장되고 있다.
"지식은 힘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나의 신념에는 추호의 변함이 없다.
진리탐구와 지식의 확장이 인간의 생활을 윤택케 하고 지고한 가치와 규범을 계속 공급함으로써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해 줄 것이다.
②교육(敎育)의 목적(目的)
대학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한 새 인간상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의과대학의 교육목적도 이에 부합하는 것이라야 하겠다.
의과대학은 의사 및 간호사의 배출과 의학자를 양성하는 양대 기능(兩大 機能)을 가지고 있다.
의사는 단순히 의술(醫術)을 시술하는 전문인에 불과한 존재는 아니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다"고 할 때의 인술은 그 의사의 전인적인 인격을 기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술은 끊임없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요청하기 때문에 의사는 학자적 양심과 태도를 갖추어야 하며 약 25명의 파라메디컬 퍼스넬(Paramedical Personnel)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격적 감화력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과대학은 의사를 배출할 뿐만 아니라 대학의 본래 기능인 진리탐구와 연구를 담당하고 지식을 보존 개발하는 의학자를 확보해야 할 중대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기능 가운데서 우리 대학에의 시대적 요구와 우리 학교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로 보아 오히려 후자(後者)에 더 일층 노력을 경주해야 하리라 믿는다.
이 같은 의과대학의 이중(二重)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물론 대학이 충분한 여건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그에 선행하여 교수와 학생이 일치하여 뚜렷한 가치관을 확립함으로써 투철한 역사의식과 시대적 사명의식을 고취 함양해야 할 것이다.
곤경(困境)과 불비(不備)의 여건을 초극하고 창조를 지향(指向)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의료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의지가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