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학교(學校) 운영방안(運營方案)
예산의 절대적인 부족은 학교행정, 시설, 교육의 낙후와 부진(不振)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 구성원의 사기도 극도로 저하시켰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가상승과 경비증가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재정(財政)의 상대적 감소는 대학발전의 근본적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대학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현실로서는 불가항력적인 현상이다.
다만 대학재정의 궁핍이 교육성과와 연구의욕이 역기능(逆機能)으로 작용하는 엄연한 현실을 간과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나는 비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의 기대치(期待値)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숙고해보자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현재 우리 대학 연구비의 대부분은 CMB, 문교부, 과학기술처(科學技術處)의 재정적 뒷받침을 받고 있으나 그 책정이 현실적이지 못해 퍽 곤란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나는 임기 동안 재정지원 보강과 충분한 연구비 확보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결심이다. 물론 그 성과에 대해선 지금부터 우려되는 점이 많다.
의과대학은 기초교실(基礎敎室)과 임상교실(臨床敎室)(나는 원칙적으로 이와 같은 어휘 사용을 싫어한다)이 긴밀하게 상호 협조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따라서 이 양자는 상호 보완적인 존재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론이 실제를 타기(唾棄)할 때 그것은 날개 잃은 새의 처량한 모습일 뿐이며, 실제가 이론을 두려워하고 경원할 때 그것은 알맹이를 던진 허황한 꿈의 껍질에 불과하다. 이론과 실제가 동 좌표 상에 공존할 때 의학은 창조와 발전의 궤적을 그릴 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근래의 특이한 사회적 추세가 우리 대학의 기초교실에 끼친 위해(危害)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기형적인 경제구조는 기초교실의 출혈을 강요하여 빈혈(貧血)을 초래했고 기초요원의 연구의욕을 저하시켰다.
이것은 중대한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평소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생각만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지위에 있음을 깨닫고 나는 그를 위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기초요원의 확보는 우리 대학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긴요하고 시급한 문제이다.
④ 교수(敎授)
교수문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로 반성하고 시정해야 할 사항이 있으나 우선 몇 가지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점을 나열해 보면 :
첫째, 교수 임용은 원칙적으로 우리 대학의 각 교실에서 잘 훈련되고 연구업적이 풍부한 우수한 인재 중에서 할 것이며, 약 5년의 간격을 두는 것을 환영한다. 또한 승진에 대해선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인사원칙을 마련함으로써 신중을 기해 공평무사하도록 할 것이다.
해외에 파견될 교직원에 대해서는 2년 이상 절대 허가하지 않을 방침이다. 만약 2년 이상의 수학을 요하는 경우엔 일단 사표를 수리할 것이며, 학문 완성 후 귀국 시에는 우선적으로 채용할 것이다.
둘째, 시니어 스텝에게는 해외의 새로운 연구과정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도록 노력해 보겠다.
셋째, 스텝을 채용하는데 있어서 종래의 편협적인 태도를 불식하고 가능한 한 타 대학 출신일지라도 우수한 학자를 채용할 수 있도록 하겠으며 초청교수제를 마련하여 타 대학의 유수한 스텝을 세미나나 컨퍼런스 등에 참석시켜 대학 간의 유대를 강화하겠다.
⑤학생교육(學生敎育) 문제(問題)
나는 우리 대학의 학생들에게 깊은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그것은 단지 우리 학생들이 갖는 두뇌의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 대학의 학생들이 보여준 높은 수준의 해결방안을 볼 때, 나는 우리 대학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다.
학장에 취임하기 전 나는 많은 학생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을 크게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문제를 직시할 수 있었고 사태를 판단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명석하고 예리했다.
대학의 구성원은 학생, 교수, 사무원들로 그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협조가 없이는 대학은 도저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고양하고 실천할 때만이 대학은 최대한의 발전을 보장받는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을 자유롭게 개방하여 학생들의 문제와 의견을 직접 들을 것이며, 월 1회는 특별히 학장, 학생의 대화의 시간(Dean's day)을 정해서 학생 대표들과 만나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대학은 훌륭하고 쟁쟁한 교수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학생들 또한 특별히 선택된 우수한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어 운영의 묘를 얻는다면 우리 대학의 장래는 극히 낙관적이고 희망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학생들의 건전한 과외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우등생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대우하는 문제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캠퍼스 내에서의 자유와 민주적인 학풍(學風)을 조성키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마음가짐이다.
한편 커리큘럼(교육과정)개편은 절실한 시대적 요청이다. 전 세계 각국의 의과대학 들은 지금 앞을 다투어서 교육과정 개편을 단행하고 있다. 이는 허영과 가식(假飾)에 의함이 아니요 전통적인 경험과 결과에 바탕을 둔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어서 우리 대학에서도 커리큘럼 개편작업을 위해 이미 예비조사를 거의 끝마치고 자료를 분석·정리하여 만든 '교육과정 개정 연구'라는 책자를 내놓은 바 있는데 지금 실천을 위한 기초자료로 예리한 재검토를 가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새로운 커리큘럼이 시행되리라고 믿으며 그 방안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실정에 맞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2억 1천만 원 예산으로 1천 3백 평 규모의 기초교육 다목적 실험실 건립이 설계과정에 있어 내년 중엔 완공할 것이며, 또한 효과적인 학습과 연구를 위한 최신형 도서관 시설을 위한 종합적인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우리 대학도 명실 공히 대학의 대학이 될 것이다.
신축 중인 병원의 완공이 목전에 다달았으므로 임상실습의 합리화 및 효율화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예의 검토 성안(成案)하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베드 사이드 티칭(bed-side-teaching)에 입각한 교육 방안을 강구중이다.
이상 나는 학장에 취임하면서 평소 지녀왔던 신념과 계획의 일부를 나열해 보았다. 그러나 학장 취임 후 많은 세월이 흐르지 않았고 경험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로 미비점과 결점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민주사회는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포용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비록 극소수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만을 토로하고 부정하는 사람이 더욱 귀중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반대와 부정은 결국 그 속에 창조에로의 긍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대나 부정, 불만이 음성적인 성격을 노정할 때는 파괴적인 독소작용 이외의 아무것도 남길 수 없음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건설적인 토의나 토론은 언제나 큰 의의를 지닌다고 믿는다.
학장실은 항상 개방되어 있으며, 나는 누구와도 면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대학은 우리들 모두의 공동 소유물이다.
1970년 7월
학장 권 이 혁 (權 彛 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