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지만 어떤 자리를 맡게 되면 나름대로 포부가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몇 가지 생각한 것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교육과정 개편이었다.
교육과정위원회 내에 소위원회를 두고 이 소위원회에서는 기본적인 골격을 다루도록 하였다. 교육과정개편에 손을 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 후에도 일제시대와 같은 과정이 답습되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방 후 적지 않은 수(數)의 인사가 미국(美國)으로 건너가서 미국식(美國式) 의학교육(醫學敎育)의 철학과 방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식의 교육과정이 하루아침에 편성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래 모방은 나름대로 값진 면이 없지 않다. '나의 것'이나 '우리의 것'이 없는 경우에는 모방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류(人類)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모방과정(模倣過程)없이 창조(創造)가 창출(創出)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보면 우리들이 지내온 발자취를 혹독하게 비판할 수만은 없다. 당시 우리 교육계에서는 '국적(國籍) 있는 교육(敎育)'이 강조되었다. 우리 것을 찾고 우리 것을 만들자고 외치는 목소리도 높았다. 의학교육(醫學敎育) 분야도 예외일 수 없었다. 우리 실정에 알맞은 교육과정(敎育課程)을 만들어 보자는 소박한 소원이 과정(課程)개편을 시도하게 된 동기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일이 말과 같이 쉽지는 않았다. 교수들에게는 자기 영역만을 존중하는 습성이 있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사소한 변화도 수용하지 않고 종전의 양식을 그대로 고집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어느 부분은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토의과정에서는 옳다고 하던 교수도 막상 구체적으로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는 반대를 한다.
이럭저럭 1년 반이 지난 후에 겨우 개편안(改編案)이 마련되었다. 소위원회에서 본위원회로 회부되자 시시비비가 또 벌어졌다. 겨우 합의점을 찾아서 교수회의에 제출하였다. 왈가왈부가 되풀이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결국 개편안은 통과되었으니 흐뭇한 느낌마저 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개편의 원리(原理)로는 여러 가지가 설정되었는데, 그 중 두드러진 것은 '의학은 하나(Medicine is one)'라는 것을 최대한으로 반영시킨 점이다. 기초의학(基礎醫學)과 임상의학(臨床醫學)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인데, 이 양자를 따로따로 생각하는 인사가 의외로 많은 것도 사실이다. 기초의학이 없는 곳에서 임상의학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이 원리(原理)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개편안에는 일종의 통합교육방법인 소위 '블럭 렉쳐(block lecture)' 방법을 채택하였다.
예컨대 심장질환의 경우 단순히 내과학상(內科學上)으로 뿐만 아니라 해부학적(解剖學的), 생리학적(生理學的), 병리학적(病理學的), 예방의학적(豫防醫學的), 내과학적(內科學的), 외과학적(外科學的) 측면에서 살펴보는 교육방법인 것이다. 의학(醫學)이 하나라는 개념을 구현시키는 데에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이 교육방법은 좋은 호응을 얻었고 많은 대학에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또 하나의 원리(原理)는 우리 실정에 맞는 교육내용이라야 한다는 점이다.
외국(外國)에서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믿어지는 질병에 대하여 정열을 쏟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질병에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모순이다. 이와는 반대로 실제로 우리 주변에 많이 존재하는 질병에 대하여는 보다 많은 시간이 배정되어야 한다. 즉, 별로 활용되지 못하는 부분에 배정된 시간을 축소하고 새로우면서도 실제로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하여 보다 많은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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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1970년 6월 1일자 필자의 인터뷰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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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안(改編案)이 채택되어 실천에 옮겨진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닉슨 대통령(大統領)이 집권하고 있을 때였는데 대통령을 보좌하는 과학고문인 데이비스 박사가 내한 중이었다. 이 데이비스 박사가 만나자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과학자 5명과 대학(大學)총장 5명을 거느리고 내한하였는데 대학총장 중의 한 분은 의학자(醫學者)였다.
데이비스 박사는 의학교육과정을 개편했다는 데 그 동기가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한다. 생각하고 있는 대로 답변하였더니 학생들이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미국으로 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한다. 한국실정에 맞는 의학교육을 시키고 학생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한국에서 봉사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당시 서울대 졸업생의 경우 클래스에 따라서는 80%이상이 미국으로 건너갔었다. 교육과정개편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10년쯤 후의 일이겠지만, 그보다도 첫째로는 보다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둘째로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까닭에 미국으로 간다는 답변을 하였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국가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교육을 시킨 의사들인데 자기 나라에서 봉사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미국에서 의사가 모자라니 미국으로 오는 의사를 환영한다는 미국의 정책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더니 그래도 납득이 안 간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궁리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했다. 6·25동란 중 미국의 젊은이들이 3만 6천여 명이나 우리나라에서 전사하였다. 우리들은 항상 미국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으며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미국에서 의사를 환영했다기에 보답하는 뜻으로 미국에 간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생각해 봐야 할 과제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경제상태는 형편이 없었다. 그러니 미국으로 건너가서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받고 보다 훌륭한 공부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모국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 우선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래도 데이비스 박사가 말하는 애국관(愛國觀)이나 사명감(使命感)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교육과정(敎育課程)위원회는 언제나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사회가 변천하는데 따라서 교육내용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상식이다. 물론 교육 과정이 빈번하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원회는 항시 가동해야 하며 개편의 필요성에 대비한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어느 대학(大學)에서나 교과과정 위원회는 권위가 있어야 하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능동적으로 소임을 다해야한다. 그리고 모든 교수와 학생은 이 위원회의 방침이나 결의사항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