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3대 기능이 교육(敎育)·연구(硏究)·봉사(奉仕)로 집약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학장으로 취임한 후 새삼스럽게 이러한 기능들에 대하여 살펴보게 되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름대로 포부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가 개원의(開院醫)들에 대한 보수교육 문제였다.
대학은 훌륭한 의학자와 훌륭한 개업의(開業医)를 배출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특히 개업의(開業醫)들에 대하여는 대학으로서 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일종의 대사회(對社會) 봉사(奉仕)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개업의를 배출해 놓고 방치한다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72년 7월 나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항상 직속으로 연수교육위원회를 구성하였다. China Medical Board가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이 위원회는 예정대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개원의(開院醫) 연수와 더불어 교수훈련 프로그램도 다루었다. 3개월 뒤인 10월에는 처음으로 개업의 연수강좌가 개최되었다.
한편, 의과대학장들로 구성된 한국의학교육협회(韓國醫學敎育協會)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심층적으로 토의되었으며 의학교육연수원 설립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즉 같은 25일부터 3일간의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개최된 의학교육 워크숍에서 이에 관한 토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워크숍에는 외국인 전문가들이 초청되어 자문위원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 워크숍을 위한 준비위원으로 이대의 김귀자(金龜子) 교수, 연대(延大)의 김일순(金馹舜) 교수, 가톨릭대의 민병석(閔丙奭) 교수, 서울대의 고광욱(高光昱) 교수와 김용일(金勇一) 교수가 활약하였고 나는 위원장직을 맡았었다. 또한 자문위원으로 호주의 Frederick M. Katz 교수와 Francis D. Rundle 교수, 캐나다의 Douglas C. Massay 교수, WHO 서태평양 지역 사무회 교육담당으로 근무하던 호주인 A.M. Rankin 박사(후에 주한 WHO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주한 수석 고문관으로 근무 중이었던 파키스탄인 M. Iliyas 박사가 초청되었던 것이다.
준비위원회는 6월에 발족하여 6월 23일, 7월 7일, 7월 14일, 7월 20일, 8월 31일, 9월 2일에 열렸고, 10월 7일에는 최종회인 제7차 위원회가 열렸다. 준비위원회에서는 모든 세부사항이 진지하게 다루어졌으며, WHO자문관인 Iliyas 박사도 매번 참석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비교적 많은 수의 회의를 준비하였고 참석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이 준비위원회가 떠오른다. 그 만큼 이 준비위원회를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던 것이다.
이 워크숍은 workshop-type seminar 성격을 띠었으며, 우리나라의 의학교육사상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고 자평하고 싶다. 제안 설명에 이어 6개 분과로 나누어져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내용이 토의되었다. ①보건수요와 의학교육, ②교육계획에 있어서의 목적의 구현,③효율적인 교육방법, ④평가.
워크숍의 준비와 진행에 있어서는 특히 고광욱(高光昱) 교수와 김용일(金勇一) 교수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두 교수는 최규완(崔圭完) 교수와 함께 편집위원이 되어 간행물을 발간하는데도 적극적으로 기여한 바가 컸다.
다음해 6월에는 장차 설립될 의학교육연수원의 교육요원 훈련과정을 이수케 하기 위하여 4명의 교수를 호주 Sydney 소재 New South Wales 대학교 부설 서태평양 지역 의학교수연구원(Regional Teacher Training Centre)에 파견하여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당시 WHO에서는 각국의 의학교육연수원을 설치할 것을 강력히 권고 했으며 지역 연수원을 호주에 개설하였었다. 나는 워크숍을 통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연수원의 설치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설치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말과 같이 쉽지는 않았다. 이 연수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부족했던 것이다. 정부의 관계 인사들에게 올바른 인식을 주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해 11월에는 정부와 WHO사이에서 지원협정이 체결하였고 서울의대 내에 '시청각 교육자료 센터(audio-visual)'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센터에서는 기재를 항시 전시하고 순회교육을 담당하였다.
다음 해인 74년 2월에는 문교부장관이 의학교육연수원 설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서울대학장인 나에게 의뢰해왔다. 이때부터 의학교육연수원 설치에 관한 구체적 계획이 마련되었고 규정안도 서울의대 내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학교육연수원(韓國醫學敎育硏修院)으로 하여 독립적인 기관으로 설치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안으로 서울대학교 본부를 통하여 문교부에 올렸다.
그 해 8월에 나는 김용일(金勇一) 교수와 함께 Manila를 방문하고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이던 Francisco J. Dy 박사와 연수원 설치문제를 놓고 격의 없는 토의를 하였다. Dy박사는 의학교육연수원(National Teacher Training Center for Health Personnel)을 서울에 설치하고 WHO에서 적극 지원하겠다고 확답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의학교육연수원 규정이 공포되었고 적은 액수이기는 하지만 예산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독립 기관으로 설치하도록 하였던 교수회의 원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서울의대 내에 두도록 되었다.
다음 해인 75년 2월에는 연수원 설립을 위한 서울대학교 설치법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다음 달인 3월에는 학장인 내가 초대 원장을 겸임하게 되었고 의학교육연수원의 개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윤천주(尹天柱) 서울대 총장, 신현확(申鉉碻) 보사부장관, 조성옥(趙成鈺) 문교부차관 등 내빈과 Manila로부터 많은 WHO 인사들이 참석하여 격려해 주었던 일이 회상된다. 개원식을 앞에 두고 나는 동서인 서세옥(徐世鈺) 화백에게 부탁하여 '의학교육연수원'이라는 글씨를 써 받았고 철제 간판을 제작하여 의대현관에 의대간판과 나란히 붙였다.
의학교육연수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병설된 국립기관으로서 의학 및 관련교육 분야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연구개발과 실제적 응용을 관장하는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특히 의학·치학·간호학·보건학 분야의 교육과정 기획, 교육방법과 평가 및 교육자료 개발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와 더불어 해당 분야 교수요원의 연수과정을 운영 지원하고, 기성 의료요원 특히 개원의(開院醫)에 대한 연수교육(continuing medical education)을 담당함으로써 보건의료 인력개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서태평양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교수연수기관이다.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Manila에서는 우리 다음으로 필리핀대학교에 연수원이 설치되었다. 그 후 기존의 개업의 연수 및 교수훈련 프로그램과 더불어 시청각 교육자료센터도 이 연수원에 흡수되었다.
의학교육 연수원의 활동은 눈에 띄게 활발하였다. 고(故) 신동훈(申東薰) 형을 비롯하여 고광욱(高光昱), 김용일(金勇一), 한만청(韓萬靑), 백상호(白相豪), 최규완(崔圭完) 등 교수들이 자신들의 일과 같이 협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타 의과대학이나 치과대학·간호대학·보건대학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올린 바 있다.
나는 1년여에 걸쳐 연수원장직을 겸직하는 동안에 참으로 값진 지식과 경험을 얻었다. 그 때 얻은 지식과 경험이 후에 서울대 총장이나 문교부장관 시절에 참으로 긴요하게 활용되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연수원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연수원장은 대대로 의대학장이 겸임했으며 76년 4월에는 고(故) 신동훈(申東薰) 학장이, 80년 4월에는 고(故) 서병설(徐丙卨) 학장이, 90년에는 김상인(金相仁) 학장이, 92년 4월에는 김승욱(金勝煜) 회장이 각각 제 2,3,4,5,6,7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