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6월 30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으로부터 서울대 총장 임명장을 받았다. 임명장을 받은 후 이규호(李奎浩) 문교부장관, 김용휴(金容烋) 총무처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대통령 집무실에서 있었던 간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최(崔)대통령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서울대의 상황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계셨다. 서울대를 건전하게 이끌어 달라는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가 잊히지 않는다.
관악(冠岳) 캠퍼스는 휴교 중이었으며, 특전단(特戰團) 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진삼(李鎭三) 준장이 여단장이었다. 이(李)장군과는 초면이었지만 군인다운 군인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이때 맺어진 교분으로 이(李)장군은 헤어진 후에도 가끔 소식을 보내오곤 하였다. 이(李)장군은 후에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육군대장이 되어 육군 참모총장으로 맹활약을 한 후 체육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총장(總長)이 된 후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의 하나가 학생처장(學生處長) 임명이었다. 당시 학생처장은 공석이었으며 하루빨리 이 자리를 메꿔야 했는데 적당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관악(冠岳) 캠퍼스의 학장들과 여러 차례 회동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좀처럼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의대의 이광호(李洸鎬) 교수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李)교수는 내가 의대학장시절에 학생과장을 하다가 본부로 전보되어 학생부처장을 거쳐 학생처장으로 근무한 전력이 있어서 어느 모로 보거나 적격자였지만 나와 같이 의대 출신이라는 조건 때문에 모양이 좋지 않았다. 총장 취임식 전에는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1980년 7월 8일 나는 서울대학교 제15대 총장으로서 취임식을 가졌다. 교수회관에서 열린 이 식에는 이규호(李奎浩) 문교부장관, 역대 총장을 비롯한 여러 내빈과 교직원들이 참석하였다. 나는 취임사를 통해서 건강성(健康性)의 회복을 강조하였고 건강한 서울대학교의 건설을 당부하였다.
제(第)15대(代) 총장(總長) 취임사(就任辭)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문교부장관을 비롯한 내외귀빈(內外貴賓) 여러분, 그리고 교직원 여러분!
오늘, 한국 최고 지성(知性)의 본산(本山)인 서울대학교 제15대 총장으로 취임함에 있어 본인은 먼저 막중한 책임감과 아울러, 중차대한 사명감을 느끼게 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동안 우리 서울대학교는 종합화계획에 의하여, 지는 75년 이곳 관악산(冠岳山)에 터전을 잡은 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특히 지난 70년대에 성장과 발전의 논리를 최고의 가치(價値)로 삼은 우리 한국 사회는 이러한 논리를 성취시키기 위해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한국 대학사의 배전의 분발과 노력을 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과 사회적 요구는 교수와 학생이 서로 힘을 합하여, 대학 본연의 사명인 진리탐구, 지도자적인 인격체 양성, 사회봉사능력 배양 등을 더욱 힘차게 수행할 것을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우리 서울대학교의 교수(敎授)와 학생(學生)여러분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과 사회적 요구에 대해, 그런대로 성실하게 부응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서울대학교는 최근의 학원사태를 비롯하여, 앞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본인은 우리 서울대학교가 당면하고 있고, 또 장차 예상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가장 큰 원칙의 하나로 건강성(健康性)의 회복을 들고자 합니다. 서울대학교의 건강성은 곧 한국사회의 건강성에 직결되는 것인 만큼, 대학의 건강성회복이란 문제는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한 유기체(有機體)의 건강은 각(各) 구성부분(構成部分)의 건강을 대전제로 삼아야하듯, 서울대학교의 건강성은 교수와 학생 개개인의 건강성을 절대적인 전제조건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성(健康性)의 논리는 이른바 발전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한 조화 정신이며, 질서 정신으로 다시 풀어볼 수가 있습니다.
대학의 첫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의 본래적인 성격도 보다 고차적인 조화의 단계로 이끌어가고, 또 이끌어가야 할 과정에 있습니다.
이론(理論)과 행동(行動), 자유(自由)와 책임(責任), 지성(知性)과 감성(感性), 개인(個人과 사회(社會),개인의지(個人意志)와 국가의지(國家意志), 진보(進步)와 보수(保守), 기성세대(旣成世代)와 젊은 세대 등, 이들 사이의 조화점(調和點)을 추구해야 할 많은 명제가 우리 대학인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러한 명제 사이의 조화점을 추구하여, 우리 서울대학교가 하루빨리 건강성을 회복하도록 최선을 다해, 여러 교수와 학생들을 도와 드리고자 합니다.
서울대학교 가족 여러분의 소망이기도 하면서, 본인의 뜨거운 염원이기도 한, 대학의 건강성이 하루바삐 회복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학생제군이 자제의 철학과 대화정신을 익혀야 할 줄로 압니다.
교수와 학생이 제 본래의 역할을 잠시나마 유보하고 있는 오늘의 학원현실을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자녀를 둔 한 아버지의 처지에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건강분위기가 조성되어, 교수와 학생이 강의실에서, 또 연구실에서, 학문과 진리탐구의 열기를 더해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본인도 그러한 방향에서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
차제에 오늘의 서울대학교가 있기까지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교수 여러분에게 몇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 교수들은 교육, 연구, 사회봉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 배전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며, 최근에 거론이 되고 있는 교권 확립의 문제를 보다 자율적인 차원에서 소화하여, 학문과 학생에 대한 열의와 사랑, 그리고 굳건한 신념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교권 재정립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교권확립은 교수 자신들의 각오와 의욕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바람직한 의미의 교권이 확립되려면 교수들의 자성(自省)과 자각(自覺)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지만, 다른 차원으로부터의 정신적 ․ 재정적 지원도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대 총장들이 공약했고 또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힘쓴 바와 마찬가지로 본인도 교수 여러분이 연구하고, 교수하고, 지도하는 데 필요한 제반여건을 최대한으로 마련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리하여 전임총장의 뒤를 이어, 서울대학교를 대학원을 주축으로 하는 대학, 세계 속의 대학으로 발전시키는데 본인의 노력을 집중시켜 나가겠습니다.
이제 관악 캠퍼스는 그 발전계획 목표를 외형상으로는 대강 갖추어 놓은 것 같습니다. 교직원 여러분을 비롯한 대학의 전 구성원의 노력으로 이 어려운 단계를 어렵지 않게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산업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보다 능력 있는 엘리트를 더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이 상아탑(象牙塔)의 고고(孤高)한 기개(氣槪)를 버리고 산학협동의 정신만 지나치게 강조하여 전인(全人, 토털맨)을 양성하는 데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대학 본래의 임무인 지도적 인격체 양성이라는 면에 큰 차질을 빚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길러낸 학생들이 사회의 엘리트로서 어느 길을 지향해 가든, 모든 일에 임하는 그들의 기본자세에는 무엇보다도 나 개인의 이익에 앞서, 국가와 사회와 타인에 봉사할 줄 아는 정신이 깔려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학의 교육과저에서는 이론적인 능력과 아울러 이러한 기본자세를 확립시키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능력은 성실하고도 치열한 면학풍토에서만 자연스럽게 배양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한 학생 여러분에게도 본인의 생각의 일단을 피력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재목으로 선발된 서울대학교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의 방식은 우리 국가와 사회로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국가적인, 또 사회적인 차원에서 선택되고 신중하게 검토된 연후에 실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택된 존재로서의 투철한 국가관, 이에 따르는 남다른 안보의식으로 안정된 사회질서확립을 선도(先導)하고, 조화된 대학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역량을 다 해주기 바랍니다.
끝으로 민족지성의 전당인 우리 서울대학교를 아끼는 모든 분들의 배전의 지원과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면서,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신 문교부장관을 비롯한 내외귀빈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합니다.
1980년 7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