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서울대학교를 세계 속의 대학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외치기는 하였지만 이 과제의 해결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나는 이 과제해결의 전제는 면학분위기의 조성이라고 믿고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론이다. 면학분위기가 아쉬운 대학이 세계 속의 대학으로 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당시 일부학생들은 수업거부운동(授業拒否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나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학에서 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대학이 존재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 중에서도 미담은 있었다. 어떤 교수는 학생 1명을 상대로 하여 예정대로 강의를 마치기도 하였다.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더욱 안타까웠던 일은 시험거부운동(試驗拒否運動)이었다. 시험이란 공부한 것을 평가 받는 수단이며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는 것은 대학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소수의 학생이기는 하였지만 동료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것을 방해하거나 아예 막아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 모로 보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러한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고 경고를 거듭하였다. 실제로 시험거부와 같은 비겁한 현상이 학내에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이 이상의 비극(悲劇)은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물론 많은 교수들이 뜻을 같이해 주었다. 수업거부나 시험거부행위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어쨌든 일련의 면학분위기 조성시책과 시간표편성(時間表編成) 그리고 졸업정원제의 실시 등의 결과로 면학분위기의 조성이 표면상으로는 조성되기 시작한 것 같이 느껴졌다. 수업시간 중 앞자리 쟁탈전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탈락을 두려워하는 심정에서 경쟁의식이 팽배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당국의 획일적인 지시와 통제에 대하여 비판여론이 높아가기도 하였다.
나는 가끔 학생대표를 모아놓고 학사관리의 중요성에 관하여 설명하곤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학사관리는 대학의 생명이다. 학생들이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위기라면 대학의 생명은 끊어진 것과 같다. 이데올로기도 좋고 반체제운동도 좋지만 학사행정을 방해하는 행동만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알렸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인데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학생은 모름지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자기행위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나의 변함없는 소신이다.
또 하나는 가능하면 원로(元老)교수가 교양과목(敎養科目)을 담당토록 하는 문제였다. 큰 뜻을 안고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인상을 심어주는 과목이 교양과목이다. 학생들은 대학교수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런 과목을 담당하는 교수가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라면 첫인상이 좋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당시 대학원 상급학생이나 학원강사 따위의 시간강사가 교양과목을 담당한 예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졸업정원제로 신입생의 수가 일시에 배가 되었으니 현직교수만으로는 힘들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나는 젊은 교수는 전공과목을 맡고 원로교수는 교양과목을 맡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뿌리깊은 흐름이 있다. 원로교수는 고학년생(高學年生)을 맡고 젊은 교수는 저학년생(低學年生)을 담당하는 흐름이다.
나는 신입생들에게 올바른 인상을 주기위해 원로교수가 이들을 대해주는 것이 여러모로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을 올바르게 인식케 하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노력한 만큼 성과를 보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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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강당 기공식 (1980. 12.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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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시위문화(示威文化)에 관한 문제였다.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강조한 소신(所信)의 하나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폭력(暴力)은 용납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대학생이 완성된 지식인(知識人)은 물론 아니지만 지식인이라는 범주 속에 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식인은 교양을 전제로 하는데 어떤 측면에서도 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폭력은 언제나 적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학풍의 대학이라면 없는 것 보다 나을 것이 없다.
나와 대화를 하던 학생들 중에 이러한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간혹 예외적인 일이 발생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물론 대화를 한 학생들이 학생의 총의(總意)를 대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이야기를 나누는 대로 될 리는 만무하였다. 그러나 대화를 한 학생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의 의견에 동의했던 사람이 문제를 일으켰거나 폭력시위에 가담했을 때에는 나는 대단히 괴로웠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나름대로 걸맞는 이유가 있었다. 특히 정권의 정통성(正統性)시비가 밑바닥에 깔려있고 보면 학생들이 내세우는 이론을 덮어놓고 부인하기는 힘들 때도 많았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려고 노력했지만, 학사관리 방해나 폭력행위(暴力行爲)에 대해서는 양보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고차원의 이론보다는 우선 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섰다. 학생들 중에서 희생자가 생기는 것 이상으로 가슴 아픈 일은 없다. 한 사람이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없다면 교육자(敎育者)로서는 자격이 없다고 본다. 물론 시위를 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시위를 막는 입장에서도 폭력은 금물이다.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할 때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을 우리들은 잘 경험하고 있다.
관악 캠퍼스에 가서 사범대(師範大) 뒤에 위치한 노천(露天)극장을 바라볼 때는 감회가 깊다. 노천강당은 야외음악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약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드가 마련되어 있다. 나는 학생들이 젊음을 발산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 시설을 만들었다. 학생들이 여기서는 제아무리 함성을 지르고 체제(體制)를 비판한다고 해도 무관하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 치외법권적인 장소를 학생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판단은 빗나갔다. 학생들은 이 장소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학생들 대신 학교행사가 이곳에서 열리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나는 이 장소에서 개교기념식(開校記念式)을 개최하는 것으로 막을 열었다. 학생 대표들에게 노천강당의 설치목적에 관하여 여러 차례 설명하였지만 별로 반응이 없었다. 근래에도 이러한 사정은 비슷하다고 듣고 있다.
면학분위기 조성에 적극 참여해 주신 분들은 수없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감명을 받은 인물의 한 사람이 수위장 이종록(李鍾綠)씨였다. 오랫동안 수위로 근무한 후 수위장에 오른 이(李)씨는 수위직을 천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매사에 무게 있는 그의 언동을 나는 무던히 좋아했다.
시위 도중의 학생들도 이(李)씨에게는 깍듯이 예를 지킨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그런 때도 학생들은 이(李)씨의 말을 경청하는 듯했다. 보기가 좋지 않은 것을 벽에 붙이려다가도 이(李)씨의 말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나는 공식석상에서 이(李)씨야말로 참다운 스승이라고 소개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언젠가 문교부장관이던 이규호(李奎浩) 박사와 의견을 나누다가 이(李)씨 이야기가 나왔다. 얼마 후 근무시간이 지난 때였는데 예고도 없이 이(李)장관이 서울대학교를 찾아와서 이(李)씨를 만나겠다고 했다. 곧 이(李)씨가 소개되었다. 이(李)장관은 이(李)씨를 극구 칭찬하며 격려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