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총장 재임 시에 계획했던 일의 하나가 일본 연구소의 설치였다. 내 자신의 의견도 그러했지만 당시 주한 일본 대사이던 스노베[須之部 量三]씨의 권유도 컸었다. 스노베[須之部] 대사 개인의 희망이었다기 보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이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스노베[須之部] 대사는 관악 캠퍼스를 방문하기를 좋아했고 그럴 때 일본 연구소의 설치를 은근히 재촉했다.
일본문제 연구소 설치에 대한 나의 입장도 비교적 적극적이었다. 일본말을 할 줄 안다고 하여 일본을 안다고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일본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가금 지적해 왔었다.
한국을 알기 위한 일본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도 나는 잘 듣고 있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여러 분야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많은 전문가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을 기회가 많았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우리가 일본에 관하여 보다 체계적(體系的)으로 곡ㅇ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대학교와 일본의 동경(東京)대학사이에는 친선 농구시합이 연례행사로 열렸다. 한해는 이쪽에서 가고 다음해에는 저쪽에서 온다. 이 행사는 비교적 뜻이 있었다. 젊은 학생들은 기성인과는 다른 입장에서 접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언어 장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이 잘되었으며 합창(合唱)으로 분위기를 돋우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랑도 서슴지 않았다. 모든 경우에 상대에 대하여 잘 안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나는 학내에서 여론을 수집해 보았다. 일본어과(日本語科)를 신설하는 데 대하여는 반대가 상당히 있었으나 연구소(硏究所) 설치에 대하여는 그렇지도 않았다. 연구소 설치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학의 김규환(金圭煥) 교수를 위원장으로 위촉하였다. 말하자면 김(金)교수가 창구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김(金)교수는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동경(東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일본통이었다. 그는 서울대 신문대학원장과 신문연구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김(金)교수는 연구소 설치에 대하여 적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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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들을 모시고(김성진 선생의 환국기념) 왼쪽부터 김동익 선생, 윤일선 선생, 한 사람 건너 김성진 선생, 서병설 선생, 나세진 선생, 나 (서율대 교수회곽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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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스노베[須之部] 대사가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으로 발령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81년 8월 초에 일본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일본 외무대신 소노다(園田直)씨 명의였지만 스노베(須之部) 차관의 아이디어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비서관이던 김용두(金容斗) 사무관을 대동하여 일본 방문길에 올랐다. 8월 4일 외무성으로 스노베[須之部] 차관을 방문하고 일련의 계획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직후에 동경(東京)대학의 히라노[平野龍一]총장을 방문했다. 나의 방문목적을 히라노[平野]총장은 물론 알고 있었다. 나는 서울대학교에 일본(日本) 연구소(硏究所)를 개설할 터이니 동경(東京)대학에 한국(韓國) 연구소(硏究所)를 만들자고 제의하였다. 양교가 동시에 연구소를 개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합리적이라고 나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히라노[平野]총장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어려운 문제인데 특히 홍고(本鄕)캠퍼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며 그 다음날 방문하게 되어 있는 고마바[駒場]캠퍼스에서는 혹시 이 문제가 잘 해결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여운을 남긴다. 동경(東京)대학에서는 홍고[本鄕]과 고마바[駒場] 캠퍼스가 주된 캠퍼스인데 전자는 본래의 동경(東京)대학이고 후자는 구(旧) 제 1고등학교 자리이다. 2차 대전 후(大戰 後)에는 교양과정부와 교양학부가 들어섰다. 일본의 교양과정은 2년제인데 동경(東京)대학에서는 이 외에 4년제 교양학부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총학생의 반이 고마바[駒場] 캠퍼스에 있는 셈이다.
나는 히라노(平野)총장에게 홍고(本鄕) 캠퍼스에 연구소를 설치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홍고(本鄕) 캠퍼스의 교수 중에는 상당한 수의 좌익이 있고 조총련(朝總聯)이 주목을 하고 있는 까닭이라고 답했다. 사전 토의가 상당히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 나는 김(金)비서관을 대동하고 고마바[駒場] 캠퍼스로 갔다. 교양학부장을 비롯하여 6명의 교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도착하여 토의를 하고 점심을 함께 하면서 토의를 계속하다가 오후 4시 경에 끝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6명의 교수는 한국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교수는 김삿갓 연구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교수는 서울시의 교통량(交通量)을 계산하고 교통난이 심각한 문제로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각자의 연구결과가 실린 학술잡지가지도 제시했다. 나는 그들의 연구에 놀랐다. 그렇게까지 연구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연구소 설치 문제를 놓고 장시간 의견교환을 하였다. 여기서도 사전 토의가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한국 연구소라는 명칭 사용이 아직은 빠른 감이 있으므로 '청구(靑邱)연구소'라고 하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명칭의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서울대학교에서 '왜국(倭國)연구소'라는 명칭을 써도 좋겠느냐고 반박하였다. 결국 연구소 설치는 뒤로 미루고 좀 더 정지(整地)작업을 하자는 결론을 얻었다.
모임 끝머리에 어느 교수가 정중하게 질문한다.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하였다며 한국 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의 하나가 설렁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가 다니던 설렁탕집이 없어지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자기는 반만년 역사를 가진 한국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해왔으며 한국 분들이 전통(傳統)을 자랑한다고 믿어왔는데 설렁탕집이 자꾸 변하는 것을 보니 이상스러운 느낌이 든다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일본에는 하찮은 오뎅집도 수백 년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다고 부언하기도 한다.
나보다도 그 이유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 교수의 질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이 좀 잘되면 다른 사업으로 바꿔가는 경우가 많다고만 하였다. 어쨌든 교양과정부 교수들과의 대담에서 나는 느끼는 바가 많았다. 정말로 공부하고 연구해야 되겠구나 하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날 저녁 나는 스노베[須之部] 차관과 저녁을 같이 하면서 이틀 동안 지낸 이야기를 하였다. 스노베(須之部) 차관은 다음날 아침 참의원(參議院)으로 가서 외무위원장인 하다노[秦野章]씨를 만나 줄 것을 권유하였다. 나는 정치가도 아니고 외교도 모르는 사람인 까닭에 그 분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뜻은 알겠는데 밑지지 않을 것이니 꼭 방문해 달라고 간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