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급우는 200명이었다. 그 중 반은 작고했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현재 약 100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집계되는데, 연락이 가능한 급우는 약 60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학 초기에 교분이 두터웠던 학우로는 방일영(方一榮), 고(故) 김한일(金漢日), 고(故) 박성화(朴性和), 이진하(李晉夏) 제형이 있었다. 모두가 서대문(西大門) 지역에서 거주했던 관계이다. 방(方)형과 김한일(金漢日)형은 영동에, 박성화(朴性和) 형은 행촌동에, 이진하(李晉夏) 형과 나는 평동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 중 김한일(金漢日), 박성화(朴性和) 형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김한일(金漢日) 형은 백씨인 김소동(金蘇東) 선생 댁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분들은 상주(尙州)출신의 대지주의 자손들이다. 형제가 다 영화제작에 참여하여 영화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형제 감독으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많은 재산을 영화로 날린 것으로 알고 있다. 백씨 되시는 김소동(金蘇東) 선생은 제일고보 출신 선배이며 일본 명치대학(明治大學)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내가 일제 말기 도피생활을 했을 때 크게 도움을 주신 분이다. 후에 한양대(漢陽大) 영화과 교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고 문학박사 학위도 취득하였다.
급우인 김한일(金漢日) 형은 나와는 참으로 가깝게 지냈다. 예술분야를 지나칠 정도로 공부했던 김(金)형은 중학교 때부터 학업보다도 영화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대성하기 전에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내 자신도 영화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중학생 때부터 김(金)형 형제로부터 얻은 자극이 컸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 형제를 통해서 많은 영화배우도 알게 되었다.
이진하(李晉夏) 형은 나보다 한해 늦어서 성대예과(成大豫科)에 입학하였고 의학을 공부했는데, 6·25사변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선고장께서는 오랫동안 서대문 네거리 근처인 교남동(橋南洞)에서 개업하고 계셨다. 이(李)형은 의과대학 졸업 후에 정형외과를 전공하였는데 현재는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박성화(朴性和) 형과의 인연 또한 특별하다. 함북 북청(咸北 北靑) 출신의 수재였는데, 깔끔한 성격에 학업성적도 우수했다. 서도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으며 중학생 시절에도 이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졸업 후에 일본 조도전대학 이공학부(早稻田大學 理工學部)에서 공부하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학병으로 가게 되어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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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동기생들/ 뒷 줄 좌단이 나 (1940. 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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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에는 의무적으로 일기를 썼다. 매주 담임에게 제출하고 평을 받게 된다. 간혹 교장선생이 평을 써주시기도 하였다. 4학년 말경으로 생각되는데 클래스메이트의 일기장을 모아 가지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담임선생에게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교무실로 들어가자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담임이던 전중(田中)선생으로부터 임원빈(任元彬) 군이 매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임(任)형은 정동(貞洞)보통학교를 거쳐 나와 급우가 된 친구인데 별로 공부에 열중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성적은 언제나 수석이었다. 대단한 수재였던 것이 틀림없다. 설치지 않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모범생이라고 나도 믿었다. 그런데 이 임(任)형이 매를 맞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임(任)형이 정동(貞洞)에 소재한 소련영사관을 방문하여 모스크바에 보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나이 먹은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재차 방문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였던 만큼 경비가 엄했고 영사관 근처에는 반드시 감시초소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헌병대에서 이런 일을 관장했다고 듣고 있다. 영사관에서 나오는 임(任)형을 체포하여 일단 학교로 보냈다가 수감한 것으로 듣고 있다. 임(任)형은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해방이 되어 출옥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임(任)형은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말았다.
임(任)형과 관련된 사건은 조선해방동맹(朝鮮解放同盟)사건으로 불리우는데, 그 연유에 관하여는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일명 고려회(高麗會)사건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우리 동기생 중에서는 임(任)형을 비롯하여 양동섭(楊東燮), 김종윤(金鍾潤), 박찬오(朴贊五), 송택영(宋澤永), 김준회(金俊會), 이권재(李權載), 이연순(李延順), 임학수(林鶴洙), 박영대(朴榮大) 제형 등 10명이 가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들이 4학년 후반기 때, 즉 1939년 말에 일어났으며 임(任)형이 주동한 것만은 틀림없으나 그 외의 상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다. 전원이 옥고(獄苦)를 치렀고 1941년 2월에 모두가 학교로부터 제명(除名)되었다가, 2년 후인 1943년에 다시 복학(復學)되었던 것으로 듣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임(任)형 등 수 명의 학형과는 별로 교분이 없었던 관계로 이들 중 대부분의 학형이 걸어온 길에 관하여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학교 당국에서는 재발을 막을 목적으로 단단한 대책을 강구했었다는 것이 회상된다. 어쨌든 이 사건은 일제에 대하여 젊은 학생들이 봉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뜻을 지니고 있으며 경기사(京畿史)에 한 장을 장식하였다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