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총장의 이임식(離任式)은 학(學) ․ 처장(處長)과 사무국장(事務局長), 시설관리국장(施設管理局長)으로 구성되는 학장회의(學長會議) 멤버들에게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의 인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회의실(會議室)에서 조촐하게 거행되며 ‘식(式)’이라고 말할 것도 못된다. 학생들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 서울대 부총장이었던 이현재(李賢宰) 교수로부터 연락을 받고 18일 오전에 모교를 찾았다. 종전과 같이 회의실에 가서 간단하게 이임인사를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설명을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교수회관에서 정식으로 이임식을 올린다는 것이다. ‘가운’도 준비되어 있었다.
교수회관으로 안내되었다. 만원이었다. 이때의 광경을 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는 10월 19일자의 ‘창(窓)’이라는 박스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총장 부임 이래 매일 아침 8시 45분이면 간부회의를 열었는데 여태까지 단 한 차례도 순수한 교육문제에 관해 논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인문대가 위험하다. 사회대도 문제라는데.’ 그러다가 ‘오늘도 비나 왔으면 좋겠다’며 이야기가 끝나곤 했습니다.”(일동 폭소).
문교부장관으로 발탁된 권이혁(權彛赫) 전 서울대 총장이 18일 오전 서울대에서 있었던 이임식에서 스스로 ‘이임사’가 아닌 ‘솔직한 고백과 소감’이라며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이날 학생대표라고는 고작 7명, 여기에 교수 ․ 교직원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진 권(權)총장의 ‘고백’은 원고가 없는 즉흥 연설이었기 때문인지 ‘우직한 사람’이라는 평답게 시원시원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총장으로서는 낙제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숙제를 해결한 게 없고 과제만 남겨놓고 떠나게 되어 착잡합니다. ‘세계 속의 대학’과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이루는 게 나의 포부였으나 둘 다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학생대표 7명을 찬찬히 바라보던 권(權)총장이었다.
“학생제군, 대학에서 영원한 건 학문과 제자뿐입니다. 학교가 소요의 소용돌이에 빠질 때마다 근심과 걱정이 말 못할 정도였습니다.”
서울대 이현재(李賢宰) 부총장은 송사에서 “권(權)총장이 장관임명장을 받은 15일은 서울대 제37회 개교기념일로 휴일(休日)이었다”면서 “이제는 서울대의 숲에서 벗어나 서울대를 키워주실 입장이 됐다”며 장관이 되셨으니 서울대를 잘 좀 봐달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장관 영전의 후광 때문인지 이날 이임식은 여느 때와 달리 대형입간판과 8인조 실내악단이 동원되는 등 비교적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임식이 끝난 뒤 한 학생대표는 “감명 깊은 말씀인데 좁은 교수회관에서 하지 말고 학생회관 같은 데서 수천 학생들을 앞에 앉혀 놓고 했으면 더 좋았을 걸”이라며 빙그레 웃었다. “대학의 총장은 존경받을 수 있으나 문교부 장관은 존경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식장을 떠난 권(權)총장. 대학에서 잔뼈가 굵어 “대학의 아픔과 고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가 문교부장관으로서 어떤 솜씨를 보여 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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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총장 이임식 (1983. 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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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원고 없이 털어놓은 소감(所感)이어서 미비된 부분이 많지만 “비나 왔으면 좋겠다”고 한 총장 낙제생(落第生)의 이임사는 많은 신문에서 인용되기도 했으며 국회 문공위(文公委)에서 추궁당하기도 하였다. 친절하게도 서울대에서는 이 광경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아주었다. 가끔 이 비디오를 보면서 혼자서 웃곤 한다. 준비 없이 털어놓은 이야기라서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다. “단 한 차례도 순수한 교육문제에 관해 논의해 본 적이 없다”등이 그 예이다. 어쨌든 서울대학교 총장이라는 자리는 쉽지 않은 자리인데 83년 10월 26일 동아일보는 ‘우국과 소신과 갈등의 자리 서울대 총장 37년사’라는 보도하의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우국(憂國)과 소신(所信)과 갈등(葛藤)의 자리 : 서울대 총장 37년사(年史)
국립서울대학교 총장. 개교 이래 모두 16대에 걸쳐 15명이 재임한 서울대 총장의 37년사는 곧 한국 대학사, 바로 그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울대의 한 원로교수는 역대 총장들을 지사형, 중진형, 관리자형 등 세 그룹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초대총장인 미군대위 ‘해리 B 엔스테드’박사는 예외로 하더라도 2대 이춘호(李春昊), 3대 장이욱(張利郁), 4대 최규동(崔奎東) 총장은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지사형 총장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장이욱(張利郁) 박사는 도산(島山)과 함께 흥사단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했고 서울사대 학장을 거쳐 총장이 되었다. 이춘호(李春昊) 총장은 문교부 고문에서 총장으로 발탁되었고 미처 서울대의 조직이 정비되기도 전에 소위 ‘국대안파동’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었다. 최규동(崔奎東) 총장은 중동고교를 설립, 인재를 키우다 서울대 총장이 되었다.
이들 지사형은 장이욱(張利郁) 박사가 당시 안호상(安浩相) 문교부장관과 학내문제로 의견이 대립, ‘사표를 내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이사회의 결의가 있을 때까지 버틴 것처럼 어수선한 가운데도 소신 있는 대학행정을 편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재임기간은 불과 1년 남짓. 5대 최규남(崔奎南) 총장부터 10대 최문환(崔文煥) 총장까지는 전직 장관, 문교부관료, 단대학장 등에서 총장이 된 케이스로 중진형 총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관계 또는 서울대 내에서의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을 운영했으며 대개 4년의 임기를 채웠다.
11대 한심석(韓沁錫) 총장으로부터 16대 이현재(李賢宰) 총장까지는 서울대에서 오랫동안 보직을 맡았던 교수들이 총장에 임명된 케이스로 관리자형 총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역대총장 중 부총장에서 총장으로 승진된 사람은 윤일선(尹日善), 한심석(韓沁錫), 고병익(高柄翊) 총장에 이어 이번 이현재(李賢宰) 총장이 네 번째다.
또 총장재임 이후 곧바로 문교부장관으로 발탁된 사람은 최규남(崔奎南) 박사와 권이혁(權彛赫) 박사 등 2명. 역대 총장 중 최규동(崔奎東) 총장과 이춘호(李春昊) 총장 등 2명이 6‧25 때 납북되었다. 최(崔)총장은 평양(平壤)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뒤 감옥 뒷산에 묻혔다가 평양 수복 당시 후손들에 의해 경북성주(慶北星州)의 선영으로 옮겨졌으나 올해 91세의 이(李)총장의 생사는 알길이 없다.
국대안(國大案) 파동, 6‧25, 4‧19, 6‧3사태 등 어려운 시기의 서울대 총장들은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2대 이춘호(李春昊) 총장 재임 시에는 교내에서 좌우익학생들의 실력대결이 잦은 것은 물론 교수들이 테러를 당해 숨지기도 했고, 6‧25 때문에 부산의 가교사에서 대학의 명맥을 이을 당시의 최규남(崔奎南) 총장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대학신문을 창간하고 52년 4월에는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식을 갖기도 하였다.
6‧3사태 이후의 신태환(申泰煥) 총장은 학생처벌문제를 놓고 당시 윤천주(尹天柱) 문교부장관과 의견충돌을 빚어 신문에 성명을 발표하는 소신 있는 총장으로 유명했으며 유기천(劉基天) 9대 총장은 학내 사태에 강경하게 대처, 유별한 처신으로 ‘쌍권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역대 총장 중 비교적 민주적이고 부드럽게 대학을 이끌어온 사람은 최문환(崔文煥) 총장이었다는 평이 많다. 최(崔)총장은 대학행정기구 이외에 SK 교수 등 대학 내의 ‘오피니언 리더’를 적절히 활용, 교수와 학생들의 여론을 폭넓게 받아들였으며 대학신문을 독립채산제로 운영, 대학언론을 어느 정도 활성화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대 서울대 총장은 그 시대 시대 마다 학원 문제로 대부분 어려움을 겪었는데 문교부장관으로 발탁된 권이혁(權彛赫) 총장이 이임사에서 “매일 비나 왔으면 하고 바랐다”고 고백한 것은 서울대 총장이 겪는 고뇌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방형남(方炯南)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