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인 일요일 하루 종일 오 국장(吳 局長)은 관계 과장과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였으며 계획한 대로 절차를 밟았다. 서울대학교 총장 재직 시에 나도 이에 관한 공문을 받은 바 있었지만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별로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었다. 어쨌든 불똥이 떨어진 셈인데 행정책임자로서는 이 일 저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3일이 지난 후에 집권당(執權黨)인 민정당(民正黨)의 대표위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이 당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일이 안된다고 했다는데 그 진의가 무엇이며 당정협의(黨政協議)를 거쳤느냐고 묻는다. 그런 의견을 제시한 일도 없고 당정협의(黨政協議)가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고 하였다. 문교부 간부들과 상의하고 당정협의(黨政協議)를 하였다. 모두가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문제는 어떻게 대통령께 보고하느냐였다. 업무보고를 시작하려고 하니 학기조정(學期調整)의 건은 어찌되었느냐고 하신다. 업무보고 끝에 말씀드리겠다고 하였다. 첫째로 조정안은 근본적인 개선안이 못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신학기를 아예 4월이나 9월에 시작한다면 모를까 3월 1일 대신 2월 20일로 한다는 것은 별로 뜻이 없으며 이런 정도라면 현행 학칙 상으로도 조정이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둘째로는 대학의 여론과 언론에 대하여 설득력이 없다는 점, 셋째로는 불과 일주일 남짓한 기간 때문에 교육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국회(國會)에서 통과시킬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은 듣고 보니 무리하게 개정할 필요가 없겠다며 잘 수습해 보라고 하신다. 이렇게 해서 학기 조정안은 없었던 것으로 낙착되었다. 문교부로서는 걱정거리의 하나가 해소된 셈이다.
모든 경우에 그러하지만 특히 교육정책(敎育政策)에서는 백년(百年)의 대계(大計)가 주장된다. 백년 앞 정도는 내다보는 정책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은 대단하다.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줄로 안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교육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 만큼 교육정책에 대하여는 모든 국민이 전문가인 셈이다.
문교부장관에 취임하자마자 기대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교육(敎育)에 대한 열정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뀔 수는 없는 일이며 수정(修正)이나 보완(補完)이 필요한 부분은 점진적으로 보완이나 수정해 나가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기대에 어긋난다고 꾸짖는 분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경솔하게 다룰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期)한다 해도 교육정책이 모든 국민에게 만족을 주기는 힘들다. 정책, 특히 교육정책이 정변이나 혁명을 계기로 하여 근본적으로 바뀐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제도(制度)나 방법(方法)을 전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변화는 찾기 힘들다는 것을 많은 나라의 역사는 잘 말해주고 있다.
5공화국은 교육개혁(敎育改革)에 크게 역점을 두었다. 그 결과로 산출된 대학교육제도로서는 졸업정원제(卒業定員制)가 대표적이다. 졸업정원제가 안고 있는 이념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 제도 때문에 파생된 문제점은 허다하게 있었다. 언젠가는 졸업정원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졸업정원제를 당장 폐지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심각한 문제점, 예컨대 탈락자(脫落者)의 구제문제, 모집정원에 대한 자율성(自律性) 문제 등을 차분하게 해결해 나가겠다고 다짐하곤 하였다.
문교부 출입기자는 대단히 우수했으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중앙일보(中央日報)의 권순용(權淳庸) 기자, 조선일보(朝鮮日報)의 고학용(高學用) 기자,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송석향(宋錫享) 기자 등의 활약상은 지금도 돋보인다. 많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 중 고학용(高學用) 기자가 쓴 인터뷰 기사를 소개한다. 고(高)기자의 기사는 83년 10월 25일,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대학자율권(大學自律權) 보장 최대 노력’ 이라는 제목(題目)으로 인터뷰 내용이 요약돼서 실리는 동시에 “대학의 ‘갈등’ 많이 겪었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 바 있다.
“대학의 ‘갈등’ 많이 겪었다”
권이혁(權彛赫) 문교부장관은 아직 취임 초기인데도 벌써 두 개의 별명을 얻었다. ‘건강장관’, ‘솔직장관’이 그것이다.
앞의 별명은 그가 취임석상에서부터 줄곧 ‘건강(健康)한 교육(敎育)’을 강조한데서 붙여진 것이고, 후자는 대화 도중 ‘솔직히 말해서’를 자주 강조할 뿐 아니라 문교부 간부 및 교육계 인사들과 담소할 때 자기 소신에서 신변잡사에 이르기까지 꾸밈없이 털어놓기 때문에 얻은 닉네임이라고 주변에서는 말한다.
권(權)장관의 소박한 특징을 풍자하고 있는 이 같은 별명은 그에 대한 일반의 기대가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인사도 있다.
어떻든, 문교부장관의 경질을 계기로 일반 국민은 앞으로 문교시책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를 궁금해 하면서, 신임 장관의 역할에 크고 작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솔직한 자세로 건강한 교육을 위해 진력한다면 얽히고설킨 당면 과제들이 조금씩 풀려 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격동기에 서울대 총장(總長)을 역임했던 만큼, 문교행정에 대해 나름대로 이런 저런 식견과 포부를 지니기도 했을 신임장관이 어떠한 복안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권(權)장관은 ‘이제 겨우 취임 2주째에 접어들었고 부내 각 실 ‧ 국으로부터 대체적인 업무 보고만을 들은 상태이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답변이 막히는 부분도 많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질문은 가급적 피해달라고 주문했다.
- 전임 이규호(李奎浩) 장관은 이임식 때 장관 경질의 이미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문교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마치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는 자동차가 기어를 바꾸어 넣어야 할 순간에 도달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기에 장관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표현이야 어떻든 간에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되어 온 지난 3년간의 교육개혁이 전환기를 맞지 않았는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시점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 만큼 신임장관에 대한 일반의 궁금증과 기대는 매우 큰 것 같습니다.
“사실, 장관으로 발령받고 난 후, 만나는 주위 사람들마다 ‘앞으로 많은 기대를 걸겠다’고 말하더군요. 뭔가 종전과 다른 것을 내놓으라는 얘기겠지요.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과거와 다른 시책(施策)을 제시한다는 것은 힘도 들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교육은 적어도 10년, 20년 앞을 내다보고 실시해야 하는 만큼, 문교정책도 계속성(繼續性) ‧ 일관성(一貫性)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관이 바뀌었다고 해서 시책(施策)도 덩달아 변경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 정책을 다듬고 걸러서 뿌리를 내리게 하는 데 치중할 생각입니다. 일의 시작이 아니라, 시작된 일을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나가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제5공화국은 개혁(改革)중심의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교육개혁입니다. 그 큰 흐름 속에서 새로운 제도가 생기고 이제 3년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당초에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이 생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책방향이 흔들리게 되면 전체를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냥 밀고 나가야 합니다.
- 그러나 현저히 나타나는 문제점이나 불합리(不合理)한 점(點)의 보완에 인색해서는 안 되겠지요. 현행 교육제도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졸업정원제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일선 대학총장을 지내셨으니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테지만, 이 제도는 이른바 ‘공부하는 대학’으로 유도하는 데 크게 기여한 반면, 문제점도 그에 못지않은 실정입니다. 학생들을 점수벌레로 만들어 학문탐구(學問探求)와는 거리가 있는 분위기를 조성, ‘이게 무슨 대학교육이냐’라는 비판과 함께 교수 ‧ 학생 간, 학생 상호간의 불신감(不信感) 및 갈등(葛藤)의식을 팽배시키는 등 부작용을 열거 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말해 서울대 총장으로 일하는 동안 이 제도로 인해 어지간히 갈등을 겪었습니다. 학교에 따라 부작용의 정도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울대는 어떠냐 하면 가장 두드러진 대학입니다. 그러므로 저만큼 갈등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졸업정원제(卒業定員制)의 장단점(長短點)을 떠나, 엄격한 학사관리로 면학분위기를 채찍질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귀여움을 받게 하려면 쓸모 있는 인재가 되도록 대학에서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4년 동안 대학교육을 받았는데 전혀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본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학교는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명문대학의 신입생 수준은 선진국 대학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으나 졸업할 때는 큰 격차가 벌어진다고 비판받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명문대학들도 처음에는 거의가 엉터리였으나 대학이 책임을 다하고 성과를 높이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며 자체적으로 학사관리(學事管理)를 엄격하게 한 결과, 오늘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대학’을 겨냥하고 있는 이 제도의 취지와 근간(根幹)은 살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난 8월에 문제점을 완화하는 개선책도 나왔으니까 당분간은 그대로 시행해 보자는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