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면도 많았다. 복학 후에 있을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검토해 보았다. 유신(維新) 시절인 74년 말, 정부는 구속 등 처벌학생을 일괄 구제하여 다음 해 신학기에 복교시켰다가 학원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다시 강경대책으로 선회하는 쓴 경험을 했던 일이 있었다. 이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바람인 것이다.
이 조치가 환영할 만한 것이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을 학원에 떠맡기는 것만으로 문제들이 치유되겠느냐는 불안이 대표적이었다. 이제까지 대학은 타율적으로 운영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대학이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자율역량(自律力量)이 문제인 것이다. 자율역량(自律力量)과 자치능력(自治能力)은 물건의 앞뒷면과 같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들이 하루아침에 생성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까닭에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 조치(措置)의 실행을 위해 법적 근거와 기준을 마련하였다. 즉 제적생을 복교시키기 위해서는 각 대학의 학칙 개정이 선결돼야 하기 때문에 학칙개정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대학생정원령(大學生定員令) 개정안을 83년 12월 22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학원사태와 관련된 제적생이 입학하는 경우에는 정원 외에 규정된 입학인원에 저촉 받지 않고 예외로 인정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학원사태 등과 관련되어 징계에 의해 제적된 자는 재편‧입학을 금지한다’고 규정된 조항을 자율적으로 개정토록 각 대학에 시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복교시기, 군 입대 제적생 등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나는 84학년도 신학기를 겨냥해서 대학의 자율운영풍토(自律運營風土)를 조성하기 위해 앞으로는 학원사태가 발생해도 대학 스스로 해결토록 맡기겠고, 자체 수습이 어렵다고 판단한 총‧학장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공권력(公權力)을 학내에 투입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정부가 학원대책(學園對策)을 처벌 일변도의 획일적인 강경대처 방식에서 탈피하여 교수의 설득과 지도를 통한 선도위주(善導爲主)로 방침을 정한 만큼 학내소요를 수습하는 방식도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극단적인 학생들은 교수의 설득만으로 선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학부모뿐만 아니라 사회인 모두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 조치를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영일(寧日)없이 많은 총‧학장들과 교수들, 그리고 관계인사들과 만나서 간담하던 일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새 학기가 시작된 후 일부대학에서 과격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제적생 복교, 구속학생석방, 대학의 경찰철수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정부의 용단이 내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일부학생들이 지엽적(枝葉的)인 문제를 가지고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주장 중에는 정치적인 차원의 것이 많았지만 소위 지도휴학제(指導休學制)나 강제입영(强制入營) 등에 관한 건도 있었다. 나는 학원문제와 관계없이 신병으로 휴학할 수도 있고 학생의 의사에 따라 입영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내세우기도 했다.
대학의 기물을 파손시키거나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일들은 심히 마땅치 않았다. 나는 학원 내의 폭력(暴力)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으며 응분의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고 학내 폭력이 계속되면 학원의 자율화 기회를 잃게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학원소요는 자율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산고(産苦)이며 참고 기다리면 질서가 회복될 것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4월 27일에는 방한 중이던 히라노 류이치(平野 龍一) 동경대학 총장(東京大學 總長), 28일에는 니시하라 하루오(西原 春夫) 와세다대학 총장(早稲田大學 總長)의 예방을 받고 그들의 경험담을 들었다. 전자는 60년대에 극렬했던 학원소요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조용해지더라며 학원사태는 세월이 약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늘의 일본대학생들은 마이홈주의에 빠져 정치‧사회문제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고, 후자는 일본에서는 70년대를 고비로 대학가의 소요는 해소됐으나 청소년탈선(靑少年脫線)과 대학입시난(大學入試難)이 심각한 골칫거리라고 말했다.
일부학생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으며 기물파괴와 더불어 교직원에 대한 폭언과 집단 폭행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84년 5월 21일에는 재경 18개 종합대학 총장들이 학원은 학문하는 곳이지 정치의 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교직원 폭행이나 기물파괴는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6월 국회에서는 대학자율화정책에 관해 집중적으로 추궁당하기도 했다. 나는 학원사태의 발생 빈도가 많기는 했지만 면학풍토는 점차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8월 6일부터 20일까지 재외교포 교육실태 파악차 대만(台灣), 일본(日本), 미국(美國)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귀국한 다음 날,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CPX 중이어서 종합청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열렸다. 옆에 자리하고 있던 주영복(周永福) 내무부장관이 꾸지람 들을 각오를 하고 있으라고 귀띔해 준다. 여름방학 동안에 이루어지는 대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農村奉仕活動)이 의식화 교육(意識化 敎育)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인데 내가 외국에 가 있던 동안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각의를 주재하기 시작한 전(全)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잘 다녀왔느냐, 대우는 잘 받았느냐고 하신다. 그렇다고 했더니 잘됐다고 하시면서 꾸지람과는 거리가 먼 인상을 주었다.
2학기에 대비한 전국(全國) 총(總)‧학장회의(學長會議)에서 나는 학원 내의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학칙(學則)에 의한 처벌은 물론이고, 형사 사안에 대해서는 의법조치(依法措置)하도록 시달하였다. 이 회의는 8월 29일에 열렸는데 2학기부터는 학원폭력에 대하여 강력 대처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즉 학원자율화 시책은 계속 인내(忍耐)로써 추진해 나가겠으나 학원자율에 역행하는 폭행, 기물파괴, 방화, 화염병투척, 교권유린 등 일체의 학원폭력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과, 학원이 혼란과 방황만 계속한다면 학원자율화는 성공할 수 없고 결국은 타율의 악순환만 초래하고 대학은 다시 경색화(硬塞化)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전 대학인이 스스로 질서확립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 달라고 당부했다.
2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학원소요는 계속되었다. 서울대학은 9월 22일, 전날 있었던 총장실(總長室) 앞 복도 농성사태 등을 비롯, 그간에 있었던 일련의 학생사태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일부 학생들의 비지성적(非知性的)이고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결의문(決議文)을 전체 교수의 이름으로 채택했다.
교수들은 이 결의문에서 그동안 일부 학생들이 행한 불온유인물 살포, 불법집회의 반복, 수업과 연구분위기의 파괴 등이 대학의 사명인 교육과 연구의 기능을 저해해 왔다고 지적하고 이를 마치 정당한 학생활동으로 착각하고 있는 학생들의 비지성적이며 불법적인 행위에 직면하면서 그것에 대응한 엄격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