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 대회(大會)-3 (111회)
  제13장 보사부장관 시절

올림픽기간 중 약물검사(藥物檢査) 센터는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캐나다의 벤 존슨 선수의 약물복용(藥物服用)을 알아내고 그의 금메달을 몰수하게 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국위를 선양하는데 으뜸가는 일을 해낸 것이다.

89년 6월 5일에 대통령과기자문위원회(大統領科技諮問委員會)가 출범했다. 청와대(靑瓦臺)에서 임명장을 받고 오찬에 참석하였다. 노(盧)대통령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약물검사(藥物檢査)센터에 관해서였다. 그 당시 자신이 올림픽조직위원장이었는데 약물검사센터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이 있었고, 그 만큼 걱정도 컸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훌륭하게 이 과제를 해결하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기쁘다는 내용이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약물검사센터가 과기처(科技處) 산하에 설치되건 보사부(保社部) 산하에 설치되건 관계없는 일이었다. 어디에 설치되건 결과가 좋으면 우리나라가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보사부(保社部) 산하에 설치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두고두고 아쉬운 감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88서울올림픽은 문자 그대로 멋있게 치러졌다. 일부인사가 ‘올림픽’개최를 걱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의 국력이나 재력으로 이 세기(世紀)의 행사(行事)가 과연 잘 치러질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걱정은 선의의 걱정이었고, 한편에서는 악의적으로 ‘올림픽’을 파괴하려는 세력도 있었다. ‘올림픽’은 낭비라는 것, 분단을 고정시키기 위한 술책이라는 등 그야말로 악성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일삼는 무리들도 있었다. 북한(北韓)은 모든 수단을 다해 ‘올림픽’이 불발(不發)이 되도록 노리고 있었다. 사실상 이러한 시도(試圖)가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일들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우리는 깨끗하고 알차게 해낸 것이다.

관련 인사 모두가 자신의 일같이 뛰었다. 자원봉사대원(自願奉仕隊員)들의 눈부신 활약상이 지금도 눈앞에 떠오른다. 84년 LA 올림픽 직후에 LA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자원봉사대의 역할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을 들은 일이 있다. 과연 이와 같은 봉사활동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막상 겪고 보니 우리 국민성의 위대함을 새삼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경기운영위원(競技運營委員)들은 그래도 빛이 나지만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안전요원(安全要員)이나 보건요원(保健要員)은 그렇지도 않다. 어쨌든 모든 국민이 힘을 합쳤다. 정쟁(政爭)도 중단되었고 학생들도 조용했다. 자동차 운행도 홀수, 짝수제로 원만히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서울올림픽은 대성(大成)을 이루었고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찬란한 빛을 전 세계에 보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슬로건과 ‘손에 손잡고’라는 ‘올림픽’노래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88서울올림픽대회는 또 다른 차원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국제학술대회(國際學術大會)가 개최되는 한편 문화예술행사(文化藝術行事)가 꽃을 피운 것이다. 특히 8월 21일부터 9월 8일까지 19일간 계속된 제1회 서울올림픽국제학술대회(國際學術大會)(The World Academic Conference of the Seoul Olympiad 88)는 압권(壓卷)이었다. 아카데미 하우스 원장인 강원룡(姜元龍) 목사가 조직위원장으로서 심혈을 기울인 이 학술대회는 ‘후기 산업시대(後期 産業時代)의 세계공동체(世界共同體)(The World Community in Postindustrial Society)'를 주제로 하여 가족ㆍ커뮤니케이션ㆍ가치(價値)ㆍ문명(文明)ㆍ환경(環境)의 5개 부문으로 나누어져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세계의 석학(碩學) 270명이 참가하였고, 15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된 이 대회는 올림픽사상 하나의 신기원(新紀元)을 만든 것이다. 문화예술부문에서 잊히지 않는 것은 이태리 밀라노의 라스카라좌의 공연이었다. 웅장한 배경과 더불어 세계의 정상급 출연자의 열연은 나의 필설(筆舌)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생각하면 향후 100년이나 200년 내에 우리나라에서 또 다시 올림픽대회가 개최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사상 최대최고(最大最高)의 ‘올림픽 대회’를 치룬 우리들로서는 후손에게 가장 값진 유업을 남긴 셈이다.

그런데 희한한 현상이 생겼다. 몇 달이 지나자 언제 올림픽이 열렸던가 하고 의아할 정도로 망각(忘却)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올림픽이 지난 후 몇몇 외국을 방문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올림픽을 격찬했고, 한국인으로서의 보람과 긍지를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국내에서는 올림픽 열기를 찾기 힘들었다.

당시 체육부 장관이던 조상호(曺相鎬)씨는 누구보다도 수고한 분이고, 올림픽의 성공은 그에게는 어느 무엇보다도 생애를 통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올림픽이 끝나고 1개월여가 지난 11월에 모스크바에서 제2회 세계체육부장관회의(世界體育部長官會議)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曺)장관이 참석하였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으니 서울올림픽으로 화제의 꽃을 피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1985년 동베를린 IOC집행위원회에서 / 오른쪽부터 조상호총장, 두 사람 건너 김운용 IOC위원

제1차 회의는 이보다 앞서 7년 전에 파리에서 개최된 바 있었다. 120여 개국이 참가한 이번 회의에는 북한 대표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소련 체육부장관이 의장이 되어 회의가 진행되었으며 지역별로 2명씩 선출하는 부회장 선출순서가 왔다. 논의 끝에 다른 나라 장관들은 투표 없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는데 유독 우리 조(曺)장관에 대하여는 북한 측이 시비를 걸어왔다고 한다. 여러 나라 장관들이 추천하여 거명된 처지인데도 북한 측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曺)장관에 대해서만 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결과는 압도적 당선이었다. 경사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조(曺)장관 자신만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조(曺)장관이 귀국해 보니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올림픽의 열기가 시들기 시작한 것 같이 느껴졌다. 조(曺)장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넋두리한다.

나에게는 조(曺)장관의 넋두리가 남의 일같이 들리지 않았다.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있노라”고 전 세계에 외치던 우리들의 기개와 열기가 그렇게도 빨리 자취를 감출 수 있겠는가. 모든 국민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겠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정치적 불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변명(辨明)과 구실(口實)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 세기(世紀)의 성전(盛典)을 망각(忘却)케 한 책임을 다른 데에 전가시킬 수는 없다.

올림픽이 지난 1년 후 올림픽을 되새겨 보고 그 열기를 되찾아 보기 위한 여러 가지 행사가 전개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올림픽정신(精神)과 열기 앞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요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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