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원 회장에 피선 (125회)

1992년 7월 31일 대한민국 학술원 제39차 총회가 열렸다. 임기 만료로 8월 25일 퇴임하게 되는 서돈각(徐燉珏) 회장과 김재근(金在瑾) 부회장의 후임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인문사회과학부 회장과 자연과학부 회장도 선출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선출은 양부회에서 실시되었다. 인문사회과학부 회장에 이상구(李相球) 박사, 자연과학부 회장에 최형섭(崔亨燮) 박사가 연임되었다.

이어서 총회가 열렸다. 먼저 자연과학부회에서 선정된 92년도 학술원상 수상자 후보, 즉 자연기초과학에 심정섭(沈貞燮) 서울공대교수와 주충노(朱忠魯) 연세대교수, 자연응용과학에 지제근(池堤根) 서울의대교수를 승인한 후 회장과 부회장 선출에 들어갔다. 선거방식이 입후보제가 아니라 소위 교황선출방식과 유사한 방식이어서 우선 회원각자가 의중의 인물을 무기명으로 투표하게 되어 있다. 재적회원 과반수 투표에 과반수득표로 선정된다. 투표회원수가 102인이었으니 과반수는 52인이 되는 셈이다. 1차 투표결과 나는 50표를, 김재근(金在瑾) 부회장이 33표를 얻었고 나머지는 몇 분에게 분산되었다.

다수 득표자 2인을 놓고 결선투표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내가 54표 김(金)부회장이 46표였다. 1차 투표에서 13표였던 격차가 결선투표에서는 8표차로 줄어들었다. 부회장 선출에서는 1차 투표에서 차주환(車柱環) 회원이 36표를 얻었고 다음으로 이현재(李賢宰) 회원이 많은 표를 얻었는데 이(李)후보는 자진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혀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많은 선배들이 계시니 사양하겠다는 이(李)회원의 말씀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이(李)회원은 총회 전에 상당히 물망에 올랐었는데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했었다.

결선투표에서는 차(車) 후보와 전해종(全海宗) 후보가 대상자로 되었는데 차(車)후보가 63표를 얻어 부회장으로 확정되었다.

나는 애초에 학술원회장에 대하여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총회가 열리기 2주일 전에 자연 2분과의 김창환(金昌煥) 회원이 귀띔을 해줬다. 몇몇 회원들과 이야기가 있었는데 나를 회장에 추대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전해줬다.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상당히 망설였다. 첫째로는 행정부(行政府)에서 물러난 지 불과 1개월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정부에서 일하는 것을 일종의 외도(外道)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행정부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판단하였다.

둘째로는 김재근(金在瑾) 선배님께서 4년 동안이나 부회장직을 맡고 계셨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김(金) 선배님은 경성제대(京城帝大) 이공학부(理工學部) 출신으로 전공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3년 선배가 되는 조선(造船)공학의 권위자이시다. 부회장이 회장으로 추대되는 것은 당연한 순리라고 생각되었다. 나의 의견을 들은 김창환(金昌煥) 회원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이미 이러한 점에 관하여는 상당히 검토했노라고 했다. 김(金) 회원은 나와 경기중학 동기생이며 일본의 제8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대(東京帝大)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캠브리지대학에서 동물학을 연구한 바 있는 곤충학자이다.

나는 평소에 그를 참다운 학자라고 보고 있었으며 언제나 경의를 표해 왔다. 사실상 그는 준재(俊才) 중의 준재(俊才)이며, 학자(學者) 중의 학자(學者)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의 많은 저작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교육행정에서도 그의 실력은 높이 평가되어 왔다.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에서 학장, 대학원장 등 요직을 거치면서 그는 십이분 실력을 발휘했다. 무게 있고 침착한 그의 인품은 믿음직한 학자로서의 존재를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판단이 결코 경솔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金)회원은 한국생물과학협회장, 한국자연보존협회장 등의 직책을 거치면서 우리사회 발전에 공헌한 바가 지대하다. 나는 시간을 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자고 했다. 좀처럼 결심이 서지 않았다.

제일 먼저 내가 속해 있는 자연 4분과의 이호왕(李鎬汪) 회원과 상의했다. 이(李) 회원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모교의 미생물학교실에서 생활하다가 고려(高麗)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미생물학자이다. 1955년 미네소타대학에 함께 갔었는데 이(李) 회원은 미네소타에 남아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귀국해서도 눈부신 활약을 계속하였다. 미국 육군성(陸軍省)에서 다년간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실패하고 만 유행성출혈열(流行性出血熱)의 병원체(病原体)를 발견하고 그 예방백신을 만드는데 성공한 바이러스학자로서 그 명성을 국내외에 떨치고 있다. 이 분야에서 모든 상(賞)을 휩쓸기도 하였다. 그 당시 그는 자연 4분과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1년 임기인 회장직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연임한 바 있다. 이야기를 들은 후 이(李)회원은 몇 분과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교황선출방법(敎皇選出方法)에 의하는 선거인 까닭에 입후보(立候補)도 못하게 되어있고 포부발표(抱負發表) 따위도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오해를 살 염려가 있어서 모든 것을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 회원들 중에는 시기가 너무 촉박하다는 점, 행정부에서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렵게 생각된다는 점을 지적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의사(意思)발표가 불가능한 것이니 못하겠다는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해주는 선배도 계셨다.

이럭저럭하다가 1주일이 지났고 총회가 열렸다. 나는 총회가 끝난 후 회장실에 들러 서돈각(徐燉珏) 회장, 김재근(金在瑾) 부회장, 이현재(李賢宰) 회원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나는 김(金)선배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스러웠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되풀이 올렸다. 다행히 김(金)선배께서는 아주 홀가분하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격려해 주셨다.

8월 26일 나는 제2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취임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전날 서(徐)회장과 더불어 인수인계업무를 마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다. 인수인계라고해야 현황보고와 학술재단(學術財團)에 관한 보고가 고작이었다. 회원들에게 인사를 올릴 기회도 없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하던 끝에 9월 8일 모든 회원을 점심에 모시기로 했다.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대접하였는데 90인이 넘는 회원들이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그 당시 90세가 넘은 회원이 일곱 분이 계셨는데 그 중에서 94세의 최태영(崔泰永) 선배님, 92세의 안호상(安浩相) 선배님과 이태규(李泰圭) 선배님이 참석하셨다. 그 외 네 분 선배님들은 거동이 거북하여 참석하시지 못하였다.

나는 회장직이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영광이지만 걱정이 앞선다는 것과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심부름꾼으로서 회원님들을 모시는데 신명을 다하겠다고 심경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회원들이 생각하는 학술원과 비회원, 일반 사회, 정부가 생각하는 학술원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는데 이 격차를 줄이는 것이 회장의 할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전년에 최형섭(崔亨燮) 회원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기문(李基文) 회원, 오상락(吳相洛) 회원, 최상업(崔相嶪) 회원, 이은웅(李殷雄) 회원을 위원으로 하는 기획위원회에서 연구하고 보고한 ‘학술원(學術院) 위상정립(位相定立)과 활성화 방안(活性化方案)’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마련하고 실현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이 오찬회는 녹십자 허영섭(許永燮)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 허(許)회장은 언제나 나를 돕는데 아낌이 없었다.

▲ 프랑스 학술원 도서관에서 (1996. 10.11.)7대 국회에 막 등원했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