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로 고생하던 끝에 김(金)선배는 1985년 7월 7일, 이 세상을 하직(下直)하셨다. 애처로운 일이다.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조사를 올렸다. 유해(遺骸)는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 동남쪽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오호(嗚呼)라! 이제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선생님에게 무슨 말씀을 올리겠습니까마는 벅차오르는 심정(心情)을 가눌 길이 없어 몇 마디 고(告)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世上)의 청산녹수(靑山綠水)는 무성하고 변(變)치 않건만 이 세상(世上)에 태어난 인생(人生)이 언젠가는 저세상으로 가게 되어 있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선생님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시니 인생(人生)의 허무(虛無)함을 새삼 느끼게 되며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선생(先生)님께서 의학(醫學)에 뜻을 두시고 일제하(日帝下)에서 우리의 얼을 구현(具現)하시던 일, 해방 후 예방의학(豫防醫學)의 개척자(開拓者)로서 이 나라의 예방의학(豫防醫學)을 체계화(體系化)시키는 데 혼신(渾身)의 힘을 다하시는 한편, 우리에게는 생소했던 공중보건학(公衆保健學)을 구축(構築)하시던 일들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선생(先生)님의 위대(偉大)하고 영광(榮光)스러운 존재(存在)를 되새기게 됩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醫科大學)의 예방의학 주임교수로서, 학생과장(學生課長)으로서, 교무과장(敎務課長)으로서, 보건대학원장(保健大學院長)으로서, 그리고 명예교수로서 쌓아 올리신 금자탑(金字塔)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시고 키워주신 예방의학 교실과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은 길이길이 이 겨레와 호흡을 같이 할 것입니다.
의학(醫學)은 하나의 종합적(綜合的)인 과학(科學)이요, 예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와 진수를 구현하신 분은 많지 않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이 원리를 실천에 옮기신 상징이십니다. 때로는 ‘호른’주자(奏者)로서 때로는 지휘자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메디컬 오케스트라를 빛나게 해주신 선생님의 예술성과 영도력은 어느 전문가와도 비견할 수 없으리만큼 훌륭했습니다. 그렇기에 세인(世人)들은 선생님을 위대한 의학자(醫學者)요, 예술가(藝術家)로 추앙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학설과 자신의 인생철학(人生哲學)으로 후진(後進)으로 일깨워 주시던 모습, 학술 발표회에서 정성과 열의로 우리들을 매료(魅了)시키던 모습,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을 유쾌하게 해주시던 모습, 명곡이나 가요를 거침없이 애창하시어 감명을 주시던 모습, 이 모든 것이 이제는 흘러간 옛일로 되고 말았습니다마는 그 정신과 유훈(遺勳)은 영원히 저희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선생(先生)님, 선생(先生)님께서 키워주신 수없이 많은 제자들은 이 순간에도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값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곁에서 내려다보시면 보람있는 일생을 보내셨다고 자위(自慰)하실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셨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정년퇴임(停年退任)하시던 날의 씩씩하시던 모습, 누구보다도 건강(健康)하심을 과시하시던 모습, 라켓을 들고 젊은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이끄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좀처럼 믿어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위독(危篤)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문병(問病)하였을 때에는 이미 의식(意識)을 잃고 계셨습니다마는 그래도 지금 선생님께서 가셨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습니다. 이제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는 곳으로 가신 선생님, 이 세상의 일일랑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편하게 쉬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곁에서 영생을 누리십시오. 문하생(門下生)을 대표해서 이만 하직인사를 맺겠습니다.
1985년 7월 9일
그 후 2년 3개월만인 1987년 10월 27일, 우리들 문하생들은 김(金)선배의 묘지에 추모비(追慕碑)를 세워 제막식을 올렸다. 다음 글은 그때 올린 나의 추모사이다.
선생님께서 저 세상(世上)으로 가신 지 벌써 2년 3개월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유수(流水)같다는 사실을 재삼(再三) 실감(實感)하게 됩니다. 오늘은 선생(先生)님의 은덕(恩德)을 기리고자 문하생(門下生)과 제자(弟子)들이 뜻을 모아 건립(建立)한 추모비(追慕碑)를 제막(除幕)하는 자리가 마련되어 이같이 많은 인사((人士)들이 참석(參席)해서 선생(先生)님을 추모(追慕)하고 있습니다.
기둥을 잃은 문하생(門下生)들과 제자들이 방황(彷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當然)하다고 하겠습니다마는 그럴 때마다 선생(先生)님의 고귀(高貴)한 말씀과 유훈(遺薰)이 우리들을 감싸주시고 깨워주시며 나가야 할 길을 밝혀 주시곤 하십니다. 오늘 제막(除幕)된 추모비(追慕碑)를 통해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문하생(門下生)과 제자로서의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先生)님의 문하생(門下生)과 제자(弟子)들은 국내(國內)에서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活躍)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先生)님께서 그다지도 아끼시고 사랑하시던 예방의학 교실(豫防醫學 敎室)과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은 선생님에게 실망(失望)을 드리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여 발전(發展)하고 있습니다.
모교의 예방의학 교실은 새로운 차원(次元)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내달에는 서울특별시의 협찬(協贊) 아래 ‘긴급구명안내(緊急救命案內)센터’가 설치되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예방의학 사상 처음으로 맞이하는 쾌거(快擧)라고 하겠습니다.
정성껏 키워주신 보건대학원도 꾸준히 발전해서 이제는 국제적(國際的)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난번에는 아시아 태평양(太平洋) 보건대학원 회의(保健大學院 會議)의 정식 멤버가 됐습니다. 모든 것이 선생님께서 끌어주신 덕분이라는 데 대해서는 더 설명(說明)할 나위가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자를 기르고 그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따라서 활약하는 것 이상으로 값진 것은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며 특별히 선택(選擇)된 분만이 지닐 수 있는 보람이라는 것을 세인들은 숙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아름답고 값진 보람을 차지하셨으며 고매한 유산(遺産)을 우리들에게 물려주셨습니다. 학문세계에서 남겨주신 유산도 대단합니다마는 인간세계에서 물려주신 유산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價値)를 지니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독보적(獨步的)인 인품(人品)과 인생철학(人生哲學), 그리고 남이 모방(模倣)할 수 없는 가지가지 취미(趣味)와 기호(嗜好)가 오늘날 우리들 문하생과 제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사들에게 깊은 감명(感銘)을 안겨주고 있는 사실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세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혈(心血)을 기울이신 ‘메디컬 오케스트라’도 시재하며 이 자리에서 추모 연주(追慕 演奏)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선생님, 지금 많은 문하생과 제자들이 추모비(追慕碑) 앞에서 선생님의 은덕(恩德)을 조명(照明)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가상히 여기시고 언제나 저희들과 같이 있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사랑하시는 가족들께서도 안녕(安寧)하십니다. 사모님께서는 얼마 전에 미국여행(美國旅行)을 하시고 돌아오셨으며 더욱 건강(健康)하신 모습을 과시(誇示)하고 계십니다. 동진 군(君)은 이제 어엿한 의학자(醫學者)로서 활약 중이며 많은 분들로부터 칭송(稱頌)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따님 동순 여사와 더불어 효도(孝道)를 다하고 있으며 효자의 호감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안 계신 이승이 어찌 외롭게 느껴지고 그럴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하게 됩니다마는 선생님에게 더 이상 괴로움을 끼쳐드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 문하생(門下生)과 제자(弟子)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報告) 올립니다.
선생님께서 떠나신 후에 우리 주변에서는 많은 변화(變化)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간에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저희들의 심정(心情)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은 역사적인 합의개헌안(合議改憲案 )에 의하여 국민투표(國民投票)가 실시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이 세상의 일은 걱정 마시고 평안하게 쉬십시오. 선생님의 은덕을 다시 한 번 추모하면서 몇 마디 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