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학생생활을 하던 중에 심심치 않게 혼담(婚談)이 오고가고 하였다. 나는 결혼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집안에서나 주위에서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회상해보면 지금도 고소(苦笑)를 참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생각나는 해프닝을 두 가지만 적어 본다.
학부 3학년 때면 '폴리크리닉' 시간이 있어서 임상실습에 나가게 된다. 나는 임상의학을 할 생각이 없어서였는지 임상실습에는 그다지 정열을 쏟지 않았으므로 동료들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하였다. 내과에는 비교적 많은 시간이 할당된다. 내과외래에 나갈 때마다 간호사 한사람이 무던히 친절을 베푼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쁘장한 이 간호사가 찾아와서 만나자고 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긴 했지만 실습이 끝난 후에 만나자고 하였다.
약속된 시간에 이 간호사가 찾아왔다. 대단히 외롭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결혼하자고 한다. 그 전에도 몇 번 청혼(請婚)을 받은 예가 있었지만 전연 결혼에 관하여는 무관심하였던 까닭에 우물우물 넘기곤 하였다.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처사였다고 자책하기도 하였지만 점심만 얻어먹고 말았던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대측에서 강제로 끌고 간 것이지 내가 가고 싶어서 갔느냐고 자기변명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아니 할 수 없었다.
간호사의 청혼을 받고 다소는 당황했다.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실습 할 때마다 마주친 것이니 남의 일 같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상대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오판한 것이니 나쁘게 생각 말라고 한다. 그 후 이 간호사는 보이지 않았다.
상급생 시절에는 의대 학생회장이란 감투를 썼다. 자연히 학생과장님과 접촉이 깊어졌다. 당시는 비뇨기과(泌尿器科)의 최재위(崔在緯) 교수께서 학생과장이셨다. 가끔 점심도 사주시고 댁으로 초대해 주시기도 하였다. 대단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진 분이며, 해방 전에는 서대문(西大門) 네거리 근처에서 다까미네(高峯)의원을 경영하시기도 하였다.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으며 학생들 사이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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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식을 마치고 명륜동 처가에서(1948. 10.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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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던가 확실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46년 가을이었다고 짐작된다. 화신(話信)백화점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하자는 분부가 계셨다. 종로 네거리에 있었던 화신(和信)백화점 식당은 당시 일류 식당이었다. 최(崔)교수를 따라서 식당으로 갔다. 조금 후에 어여쁜 아가씨가 오더니 합석한다. 최(崔)교수께서는 집안 조카라고 소개하시며 서로 인사를 나누라고 하신다. 피아노가 전공이며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며칠 후에 최(崔)교수께서 부르신다. 지난번 식당에서 만난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인상이 좋았다고 했더니 날을 잡아서 아가씨 댁으로 가보자고 하신다. 약속된 날 최(崔)교수를 따라서 사직동에 있었던 대궐 같은 집으로 갔다. 큰 규모의 고옥(古屋)이었다. 아가씨의 아버지 되신다는 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큰 상이 들어왔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며칠 후 최(崔)교수께서 또 부르신다. 아가씨 댁에서는 좋다고 하니 확실한 대답이 있어야겠다고 하신다. 지난 번에 사직동 댁에 간 것은 말하자면 아가씨 식구들에게 선을 보이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번만은 우물우물 넘어갈 수가 없었다. 교수님께서 직접 중매역할을 하신 것이니 입장이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어머님과 누님께서 규수를 만나 보신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말씀 올렸다.
이렇게 하여 어느 날 어머님과 큰 누님을 모시고 모중국식당에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머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시는 어머님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이었다.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얼굴과 목의 어느 부분인가가 탐탁지 않다고 지적하신다. 점잖고 인자하시고 남의 이야기를 안 하시고 인내성이 많기로 유명하신 어머님의 말씀이 나에게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님 같은 어머니가 또 계시겠느냐고 평소에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어머니께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니 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뜻을 교수님에게 어떻게 전해 올리느냐 하는 것이 고민거리로 되었다. 학우(學友)들과 상의하였더니 용기를 내서 직접 말씀 올리는 것이 도리라는 결론이다. 이것 저것 생각하다가 어느 날 교수실로 찾아갔다. 응당 좋다고 할 줄 알으셨던 교수의 안색이 변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교수께는 죄송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말씀을 올리고 나니 홀가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