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세월이 흘렀다. 6·25가 찾아 올 때마다 장석윤(張錫潤) 선배를 뵈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였는데 신통한 길이 없었다. 강원도(江原道) 횡성군(橫城郡)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계시다는 이야기가 있고 하여 횡성군(橫城郡)에 문의해 볼 생각도 있었다.
그러던 중 1989년 6월 16일 나의 생일날(양력으로는 7월 13일인데 음력으로는 5월 13일이다. 6월 16일은 음력으로 5월 13일이다) 가족과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다. 막내 처제인 서세옥(徐世鈺) 화백(畵伯)의 부인이 장(張)선배의 거처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며칠 후에 전화번호를 알려왔다. 횡성(橫城)이 아니고 서울의 목동(木洞)에서 지내고 계시다고 한다.
전화를 걸었더니 장(張)선배의 육성이 또박또박 들린다. 찾아뵙겠다고 하니 9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손님을 맞이할 만한 곳이 못된다고 말씀하신다. 6월 30일 플라자 호텔 한식당(韓食堂)에서 감격적인 재회의 기회를 가졌다. 89년 당시 86세의 노구(老軀)이신데도 기억력과 언어구사력은 젊은 사람에 못지않다.
제일고보 재학 시에 미국행 여권을 신청하신 일, 미국 생활이야기, 버마 전선(戰線)이야기, 미군정(美軍政)시절 이야기, 6·25동란 때의 비화(秘話) 등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회고록(回顧錄)을 내기 위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장(張)선배만큼 비화(秘話)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1951년 1·4후퇴 때 필자는 트럭 편으로 부산(釜山)에 내려갔다. 중국군이 가담해서 UN군이 다시 밀리게 된 것이다. 나는 경성(京城) 서비스공장의 간부직원과 함께 말하자면 선발대격으로 하부(下釜)한 것이다. 가족들과 공장직원들이 버스 3대에 분승하고 뒤를 따랐다. 부산(釜山)에서는 초양(草梁) 소방서(消防署)옆 공지에 천막을 치고 지냈는데 어떻게 해서 이곳을 정했는지에 관해서는 잘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어쨌든 서비스공장을 열었는데 손님은 없었고 버스를 운영하여 운수업을 시작했다. 첫날 구경서(具慶書)라는 노인이 운전을 하고 내가 차장역할을 했는데 초양(草梁)터에서 나오자마자 전주를 들이받아 문제가 생겼다. 경찰관이 달려왔는데 우리를 보고는 가엾다는 듯이 주의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구(具)선생은 우리나라 운전기사로서는 몇 째 안가는 선구자(先驅者)였지만 오랜만에 운전을 하는 것이니 손발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차장인 나는 동네 이름을 몰라서 정거장 이름을 잘못 대거나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승객들이 웃음으로 대해주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인간의 사랑은 한없이 넓고도 크다는 것을 실감한 셈이다.
얼마 후에 구(具)선생은 부산(釜山)과 대구(大邱) 간의 노선을 허가받았다. 이 노선 개설은 처음으로 개설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많은 손님이 밀려들어 즐거운 비명을 올리기도 했다. 나의 막내동생인 이빈(彛彬)군이 나와 함께 차장노릇을 하였다.
즐거운 일이 오래가는 법은 없다. 얼마 후에 밀양 근처에서 버스에 고장이 생겼다. 샤프트가 부러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야간에는 위험하다고 하여 버스만 남겨둔 채 모두가 떠났다. 다음날 가서 보니 타이어고 무엇이고 다 없어졌다.
부산(釜山)시내를 운행하던 버스 한 대는 부산(釜山) 시청 앞에서 징발되었다. 당시 백두산 호랑이라고 알려졌던 위수사령관 겸 민사부장 김(金) 모 대령이 징발한 것이다. 전시이기 때문에 이의신청이고 무엇이고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더 이상 운수관계에 손을 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서울의대를 찾아갔다. 초라한 건물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구(李濟九) 학장(學長)을 뵈었더니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이런 말씀 저런 말씀 자상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며 하루빨리 서울이 수복되는 것만이 그 길이라는 설명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부산에서는 김교명(金敎命) 형, 임광세(林光世) 형과 가끔 자리를 같이 했다. 하루는 세 사람이 모여서 군의관에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 군의관은 강제가 아니고 지원제였다. 서류관계로 세 사람이 제3육군병원에 갔다.
정문 가까이서 우연히 이찬범(李燦范) 선배를 만났다. 이(李)선배는 학위논문을 만들기 위해 송도에 위치하였던 가축위생연구소(家畜衛生硏究所)에 와 계시다가 6·25가 발발하는 바람에 현지 입대되어 대위 계급장을 달고 계셨다.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묻기에 사연을 말씀 올렸더니 서둘러 입대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머지않아 입대하기 싫어도 입대하게 될 터인데 서두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군의관 지원은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각자가 나름대로의 길을 찾기로 하였다. 김교명(金敎命) 형은 여기저기 개업 장소를 물색하다가 동래(東萊)에서 개업 중이던 후배를 돕기로 하였다.
임광세(林光世) 형은 그 후 재차 군의관에 지원하여 입대하였는데 염색한 군복 대신 원색군복을 입는 것이 소망이었다고 하니 그 동기가 재미있다. 임(林)형은 8년동안이나 군에 복무하고 전역하였는데 최종 계급은 육군 중령이었다. 훨씬 후에 김교명(金敎命) 형은 공군에 강제 입대되어 군의(軍醫) 중위(中尉)가 되었는데 실제 복무는 하지 않고 직장 근무로 병역을 마치는 특혜를 입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