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의 제9군단 민사처 병원으로 (41회)
  제6장 한국전쟁

어느 날인가 나는 노상에서 한범석(韓凡錫)선배를 만났다. 한(韓)선배는 나보다 4년 위이고 나의 학생시절에는 생리학(生理學)교실의 조수로서 실습을 도와 주셨던 분이다.

해방직후 미군정무청은 보건행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한국인 의사 10명을 미국에 보내 보건대학원에서 수학토록 하였다. 한(韓)선배는 그 중의 한 분이었고 내가 아는 바로는 우리나라의 여권번호 1번의 소유자이다.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여권이 아니라 상장(賞狀)과 같은 크기의 증명서였던 것으로 듣고 있다.

내가 노상에서 만났을 때의 한(韓)선배의 직책은 UNCAC(UN Civil As-sistance Command)의 보건 책임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韓)선배는 대단히 반갑다면서 자기 사무실로 가자고 하신다. 사무실에서는 제9군단 민사처 병원에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신다. 무엇을 하는 곳이며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군단에 신설된 민간인 대상의 병원이며 강원도 홍천에 위치하고 있는데 젊은 사람으로서는 가볼만하다고 강조하신다. 병역면제의 특권이 있으며 일단 갔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도 좋다는 말씀이다.

가겠다고 하였더니 타이프라이팅된 증명서를 발급해주셨다. 초양(草梁) 천막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고 군복을 샀다. 계급장 없는 군복차림을 한 나는 다음날 아침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당시 민간인은 서울행이 금지되었고 열차에도 승객은 거의 없었다. 군인이나 군복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한강 철교를 건널 때에는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명륜동 처가였다. 대문은 열려있었다. 앞마당에 들어가 보니 잡초가 무성했다. 키가 큰 잡초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대단히 키가 큰 잡초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던 정경이 지금도 눈앞에 방불하다.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안방, 건넌방, 행랑방들은 꼭 도깨비방과 같은 인상이었다.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었다. 을지로 6가에 있었던 서비스공장으로 갔다. 공장은 텅 비어있는데 인기척이 났다. 수원(水原)의 차재윤(車載潤) 선생이 보이지 않는가. 하도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차(車)선생도 의외라는 듯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다. 차(車)선생은 처백부(妻伯父) 댁에서 며칠 묵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 1951년 서울 을지로 / 한국은행 건물이 보인다

여기서 하룻밤을 차(車)선생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車)선생은 사업목적으로 체류 중이라고 했다. 주인은 아무도 없고 차 선생과 나만 있는 것이다. 지나온 날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간다. 처백부댁도 나에게는 여러 가지로 추상(追想)을 안겨주는 곳이다. 지금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변해버렸지만 이 댁과 얽혀 있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다음날 아침 홍천(洪川)으로 떠났다. 교통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청량리(淸凉里)에 가서 홍천방면으로 가는 트럭을 타는 방법밖에 없다. 갈 때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몇 번 갈아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민간인은 없고 군복을 입은 군인이나 군속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홍천에 닿았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서 어둡기 시작할 때였다. 미 제9군단 민사처(民事處)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왔다 갔다 하다가 흑인 병사를 만났다. 이 친구한테 물으니 얼마 전에 춘천(春川)으로 옮겨 갔다는 이야기다. 낙심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춘천을 어느 방면으로 가야하는지 조차 몰랐다.

한참 길을 걷고 있으니 오막살이 민가가 눈에 띈다. 가서보니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사연을 말하고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이부자리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저 하룻밤 지내게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조밥과 고추장을 아침식사라고 하시며 주신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며 배가 고플 대로 고팠기 때문에 무엇이든 입에만 들어가면 좋겠다는 때였다. 떠나면서 당시로는 가장 고액권인 지폐 한 장을 드렸다. 내 일생에 이런 거금을 만져본 일이 없다고 눈물을 흘리시던 할머니가 지금도 생각난다. 몇 년 후에 일이지만 일부러 이 곳을 찾았으나 그 오막살이집도, 할머니도 계시지 않았다.

운 좋게 춘천(春川)으로 가는 트럭을 탔다. 물어서 간 곳은 춘천여고 옆 2층 양옥집이었다. 여기가 미(美) 제9군단 민사처(民事處)였다. 증명서를 보이고 신고를 했다. 처장(處長)은 중령이었고 차장은 소령이었다. 미군장교들 외에 한국인 통역관도 있었다.

성(成)씨라고 하는 통역관으로부터 대체로 설명을 들었다. 민사처(民事處)의 기능은 병원(病院)과 산하 진료소(診療所)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병원은 춘천(春川)에 있고 진료소(診療所)는 9군단 관내(管內)에 수개 처 있다는 내용이다.

두어 시간 후에 차장이란 분이 만나자고 한다. 가평(加平)진료소에서 일하라는 전갈이었다. 그 날 오후 늦게 민사처(民事處)에서 내준 스리쿼터편으로 가평으로 갔다. 이미 한옥(韓屋)에 진료소(診療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직원으로는 의사 1명, 약사 1명, 간호사 1명, 가정부 1명이 한 단위로 되어있었는데 의사 이외의 인원은 배치완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진료소장으로 내가 부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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