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春川) 민사처(民事處) 병원장 시절 (42회)
  제6장 한국전쟁

임상(臨床)을 모르는 나로서는 근심이 태산 같았다. 중한 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다. 다행히 약사와 간호사는 상당히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약품의 종류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순조롭게 일을 볼 수 있었다. 민간인 환자가 대상이었지만 주민은 거의 없는 상태였고 대신 국군병사나 미군병사들이 찾아오곤 했다.

어느 날 저녁 국군부대의 모장교로부터 왕진을 청해왔다. 가보니 복통이 심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위경련임에 틀림없다. 모르핀을 한 대 주사했다. 깨끗하게 아픔이 가셨다. 난생 처음으로 명의라는 말을 듣고 고소(苦笑)했던 일이 생각난다.

두 달쯤 지난 후에 부산에 있는 집사람을 오도록 했다. 천막살림보다는 이쪽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집사람의 여행수속도 수월했다. 왜냐하면 민사처가 뒤에서 밀어준 까닭이다. 문제는 장녀인 인택(仁澤)였다. 어린것을 일선지역으로 오라고 할 수는 없고 그러자니 한 돌을 겨우 지낸 어린애를 누가 봐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인자하신 장모님께서 인택(仁澤)이를 맡아 주시기로 하고 집사람은 단신 가평(加平)으로 왔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저녁때만 되면 엄마를 찾고 우는 인택(仁澤)이를 등에 업고 장모님도 함께 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제들도 인택(仁澤)이를 지극히 돌봐주어 함께 밤을 새운 일이 비일비재하였다는 것이다.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집사람이 와서 얼마 안 된 어느 날 춘천에서 민사처(民事處) 차장(次長)이 왔다. 춘천본부(春川本部)의 민사처병원장(民事處病院長)으로 임명되었으니 곧 춘천(春川)으로 가야한다는 전갈이다. 당시 민사처 병원은 춘천여자고등학교(春川女子高等學校)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병원은 천막으로 되어 있었고 교사(校舍)는 창고로 쓰고 있었다. 언덕 위의 아담한 집이 있었는데 이것이 원장사택이었고 인접해 있는 건물을 의사(醫師)와 직원(職員)들이 숙소로 개조해서 이용되고 있었다.

미국 군인들의 대민 기본이념은 보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사처의 업무도 병원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을 표방한 미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것이 사실이다. 천막 병상 수는 약 80개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언제나 부족하였다. 이북(以北)으로부터의 피난민이 많았고 군인들도 많이 활용했다.

나는 임상의사(臨床醫師)가 아니었던 까닭에 진료업무(診療業務)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병원행정과 대민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대민사업은 시장이나 군수 또는 경찰서장을 대상으로 해서 진행되었는데 구호물자의 배급이나 식량공급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춘천(春川) 민사처(民事處) 병원장 시절은 많은 것을 회상시켜준다. 여주(驪州)에서 발족하였을 당시부터 원장 직을 맡으셨던 김윤선(金潤善)선생이 어떤 이유로 떠나게 되었는지 또 내가 어떤 이유로 임명되었는지 지금도 분명치 않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내가 임상의가 아닌 만큼 훌륭한 의료진을 갖추도록 하라는 상부의 지시였다.
 
▲ 집사람과 인택 / 미 제9군단 의무부에서 근무했던 더글라스 헤이너 박사(군의관, 육군대위)가 포턴에서 촬영한 사진이미 2001년 11월 12일 고광욱 교수 4주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을 때 나에게 전해주었다

내가 원장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근무했던 몇 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인상적인 인사로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나의 대학 후배인 김안영(金安泳) 선생이다. 남자다운 기질에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과를 전공했던 김(金)선생에 얽힌 이야기는 한없이 많다. 당시 국회의원이시던 춘부장 어른께서 일부러 찾아오셔서 그의 장래에 관한 의견을 주시기도 하였다.

그의 일생은 효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후에 한국교원대학교(韓國敎員大學校) 총장(總長)으로 재직하였을 때 김(金)선생은 조치원(鳥致院)에서 개업하였고,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인데 퇴임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몹시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교원대학교(敎員大學校)로부터 조치원(鳥致院)까지는 자동차로 불과 20분 거리였는데 그러한 사실을 몰랐던 것이 후회스럽기 때문이었다.

김영근(金英根) 박사의 존재도 특이했다. 춘천(春川)의 민사처병원(民事處病院)에서 근무한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산부인과(産婦人科) 전공의(專攻醫)로서 대단한 역할을 했다. 김(金)박사는 얼마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경응대학병원(慶應大學病院)에서 본격적으로 산부인과학(産婦人科學)을 연구했다. 귀국 후 가톨릭대학의 산부인과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던 것은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교수직을 물러난 후 김(金)박사는 역시 산부인과 전문의이신 부인과 함께 개업을 하면서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다.

김영근(金英根)박사를 보면 언제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병원장이라야 수술(手術)을 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루는 어느 기관의 간부가 필자에게 수술(手術)해줄 것을 부탁해왔다. 임상의가 아닌 필자가 집도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복통으로 보아 맹장염(盲腸炎)이 틀림없으니 원장인 내가 꼭 수술을 해줘야겠다는 간청이다. 제아무리 구실을 붙여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김(金)박사와 상의했다. 마취할 때까지만 입회하라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다.

개복결과(開腹結果)는 맹장염(盲腸炎)이 아니고 회충덩어리가 장을 막고 있어서 이들을 훑어 내린 다음에 봉합했다는 것이다. 결과는 훌륭했다. 김(金)박사 대신 내가 일약 명의로 등단한 것이다. 난생 두 번째로 명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얼마 후에 병원 간부들이 융숭한 저녁대접을 받았는데 생각만 해도 웃음이 튀어나온다.

또 한 분 김승두(金承斗) 박사가 있었다. 내과(內科)를 담당했고 착실하게 진료업무를 맡아 보았다. 김(金)박사는 남달리 음악에 소질이 풍부했는데 특히 그의 성악은 전문가에 못지 않았다. 외로운 근무지였지만 그래도 자리를 같이하고 그의 노래를 들을 때에는 누구나 예술적인 분위기를 맛보곤 하였다.

이 세분은 서울의대 제5회 동기이며 나의 후배였기 때문에 함께 지내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이상의 세 김(金)씨 외에도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었다. 그 중의 한 분이 이종식(李鍾式) 박사였는데 이 분은 연세의대를 졸업하기 전부터 민사처병원(民事處病院)에서 일하였다. 대단한 정력가이며 영어 콘사이스를 암기하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그의 자질을 아깝게 생각하여 학비를 준비해 주고 모교로 돌아가서 학업을 마치도록 하였다. 후에 이(李)박사는 임상병리학자(臨床病理學者)로서 대성하였는데 가톨릭대학의 임상병리학과장(臨床病理學科長) 재직 시 아깝게도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콘사이스를 암송하던 모습과 오페라 가수를 흉내 내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약사로 계시던 최(崔)선생도 특이한 분이었다. 장호원(長湖院)출신으로 기억되는데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다. 언제나 기도 드리기를 좋아했으며 때로는 심심풀이 화투를 칠 때도 기도를 올리곤 했다.

 
  강원도 홍천의 제9군단 민사처 병원으로 (41회)
  군번(軍番)없는 군인(軍人) (43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