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정책(大學政策)이 사회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세인들은 잘 경험하고 있다. 제 5공화국의 교육정책(敎育政策)이 우리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던 사실에 관하여는 더 설명할 나위가 없다.
문교부장관에 취임한 때는 이미 개혁정책(改革政策)이 실시된 3년 후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시 개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단계적으로 보완이나 개선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기대에 어긋난다는 여론도 있었고 미지근하다는 충고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학원문제에 대하여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취임 초기의 여러 가지 충고 중에서 연세대학의 김동길(金東吉) 교수가 83년 11월 18일자 한국일보의 ‘동창(東窓)을 열고’라는 목요(木曜) 칼럼을 통하여 나에게 준 충고는 이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대학 정책 중에서 4대 주요과제는 졸업정원제(卒業定員制) 문제, 대학입시제도(大學入試制度) 문제, 제적학생(除籍學生) 문제, 해직교수(解職敎授) 문제였다. 이 네 가지 과제에 관하여 평소에 생각하던 바도 있었고 입각한 후에 새로운 지견(知見)을 얻은 바도 있었지만 어떠한 경우이건 나 혼자서 정책을 결정하기란 벅찬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취임 초기에는 이렇다 할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의 자율권 신장만은 처음부터 내걸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동창(東窓)을 열고
김 동 길(金 東 吉) <역사학자(歷史學者)>
미얀마에서 일어난 폭파사고로 장관, 차관급 인사들이 여러 사람 졸지에 목숨을 잃고 한동안 나라 안팎이 뒤숭숭하였습니다. 일국의 국무총리는 스스로 ‘덕이 부족함’을 한탄하면서 그 자리를 물러났고, 새사람이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지난 개각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발령은 역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이규호(李奎浩) 장관이 침몰하고, 서울대학교 권이혁(權彛赫) 총장의 새로운 함대가 출범하여 이 나라 문교행정의 큰 바다를 누비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던 교수 중에서 문교행정의 총책임자가 발탁되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령 돈벌이에만 평생 관심을 쏟아온 사람이라면 자존심 하나를 삶의 기둥으로 버티고 살아온 교사들의 심리나 ‘애국과 낭만이 어째서 하나가 되지 못하느냐’고 대드는 학생들의 심리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권(權)총장의 문교장관 취임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권(權)장관께서 취임하자마자 국회 본회의가 열려 여야의 여러 의원들이 문교정책에 관한 날카로운 질의를 벌인 모양인데, 그 자리에서 답변하신 몇 가지 내용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신문에 실린 그 내용이 앞뒤를 자르지 않고 제대로 보도된 것인지, 시민의 입장에서는 알아볼 도리가 없습니다. 말이란 ‘탁’해서 다르고 ‘툭’해서 다른 것인데 대가리를 자르고 꽁지를 치면 생선의 모양이 엉뚱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말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되어 오해와 시련을 겪은 사람이 이 나라에 어디 한 둘 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죄송스런 일이 아니랄 수 없습니다.
어느 일간신문에는 권(權)장관의 답변 요지가 이렇게 실려 있었습니다.
‘……제적학생(除籍學生)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법과 학원질서를 어겨서 법과 학칙에 따라 처리된 것이다. 이들을 관용과 사랑만으로 다시 학원에 돌아오게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제적학생의 복교(復校)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제적학생의 복교가 아주 불가능하다면 새로운 문교장관의 새로운 문교정책은, 물러난 전 장관의 문교정책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과 학칙에 관한 토론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하더라도 법과 학칙 이전에 학생이 있고, 학생의 부모가 있고, 그의 형제와 친척과 친구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정치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얻어야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법관(法官)도 재판정에서 강도질을 하다 붙잡혀 온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동정한 나머지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그 정상을 고려하여 10년 징역을 5년 징역으로 깎아주는 사례가 없지 않은데, 하물며 교육의 도장(道場)에서 제적학생들이 관용과 사랑만으로 다시 학원에 돌아올 수 없다면 그들의 장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들이 학교와 이웃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장차 위험인물로 전락할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문제학생(問題學生)’에 대한 제적으로 학원 내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고, 데모도 전혀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면학분위기(勉學雰圍氣)가 대학마다 넘실넘실 감돌고 있다면 할 말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약을 줄곧 썼는데도 환자에게 아무 차도가 없다면 의사는 새로운 약방문을 생각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사랑과 관용’이 별 효과가 없으리라고 미리 단념하지 마시고 대담하게 새로운 약을 써보실 용의가 없으십니까?
길가는 사람의 외투를 벗기는 일을 ‘바람’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불수록 행인은 외투자락을 붙들고 제 몸을 더욱 감쌌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자 행인(行人)은 제 손으로 제 외투를 벗었습니다. 이 우화에 담긴 교훈을 인간은 언제나 소중히 여겨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한 마디만 더 괴로운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갖는 해직교수에 대해서 구체적인 복직작업을 진행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복직이 당연한 권리를 되찾아주는 식의 원적 복귀라면 학원안정과 질서유지를 위해 허용할 수 없다’고 장관께선 말씀하셨지요. 복직문제를 거론해 주신 사실만 가지고도 해직교수 일동은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최근에 해직교수들에게 ‘다른 대학 중에서 택하라고 하면 어느 대학을 희망하겠느냐’고 물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장관 말씀대로 ‘구체적인 복직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믿는 것이 좋을 듯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육자로서의 새로운 각오와 결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판사(判事)가 법정에서 사기꾼, 좀도둑을 앞에 놓고 ‘개전의 정’ 운운하는 것이나 ‘새로운 각오’ 운운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지난 80년 여름 그들은 어떤 경위로 물러나게 되었는지 장관께서는 ‘복직작업’을 서두르기에 앞서 개인 개인의 진상부터 알아보는 작업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정의사회(正義社會)를 표방하는 제5공화국에 단 한 사람인들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또 타 대학으로 반드시 가야 하겠습니까. 서대문세무서 직원으로 있을 때 ‘불미한 짓’을 저질렀으나 ‘새로운 각오’를 했다고 하여 그를 종로세무서에서 받아들일 마음이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오래 몸담아 가르치던 대학에서 ‘못 쓰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못 쓰겠다’는 꼬리표를 떼어주는 일 없이는 어떤 교단에도 세울 수 없는 것이며, 그 꼬리표만 떼어준다면 못 갈 대학이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가르치던 대학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장관께서는 ‘제적학생의 복교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셨고, 해직교수들에게는 '복직을 위한 새로운 각오‘를 요구하셨습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정직에 바탕을 둔 사랑과 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유망한 학생들을 복학시키고 유능한 교수들을 복직시킬 수 있는 화해의 풍토가 권(權)장관 재임시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제적학생의 복학을 제쳐놓고 해직교수의 복직을 논하는 것부터가 우리들의 사고의 허구성(虛構性)을 노출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학생이 못 돌아가는 학교에 어떻게 교수들이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