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경우 미혼모(未婚母)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이들에 관한 연구논문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필자도 미혼모에 관하여 나름대로 언급하기도 했다. 미혼모가 미혼모를 낳는다는 모 외국대학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면서 미혼모는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강조(强調)하기도 하였다. 대체로는 정신(精神)보건분야의 과제(課題)로 돌리고 있는데 이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현실을 식자들은 주지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도 미혼모 문제는 이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수(數)는 점차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보사부장관으로 재직 시에 서울시내 모 영아원(嬰兒院)을 방문한 일이 있다. 장관의 방문이니까 보사부와 서울시의 직원이 수행한다. 원장은 60대의 여사인데 말수가 적다. 수행원 한사람이 미혼모와 영아원에 관하여 설명한다. 미혼모를 일방적으로 나무라는 투다. 모든 책임(責任)이 미혼모에게 있다는 결론이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원장(院長)선생이 조용하게 입을 연다. 미혼모가 떳떳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책임의 대부분은 남자 측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영아원(嬰兒院)에 수용되어 있는 어린이들은 1~3세 층인데 그 중 80%가 미혼모의 소생이라는 것이다. 미혼모 중 상당수가 가끔 영아원에 찾아온다는 이야기다.
원장선생의 말씀으로는 이러한 미혼모들만큼 외모가 단정하고 어여쁘고 순진한 여성도 많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훌륭한 여성들이니 남성들의 눈에 띄게 마련인데 남성 중에서도 상사(上司)나 사장족(社長族)이 가장 악질(惡質)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 여성을 노리개로 삼고 책임(責任)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장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필자의 선입견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명하던 수행원의 표정도 다소 난감한 것 같이 보였다.
원장선생의 말씀을 들은 후 수용되어 있는 어린이 방에 갔다. 말을 잘 못할 정도의 어린이지만 ‘할아버지’하며 달려든다. 참으로 순진 그것이다. 동심 동심하지만 이만큼 순진한 동심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한 어린이를 안아주니까 나도 나도 하고 안아달라고 모여든다.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 귀여운 어린이들을 누가 책임져야하나. 이 순진한 어린이들이 어떻게 하면 순진한 동심을 지속시킬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리고 미혼모를 선도하고 나아가서 예방(豫防)하는 방법이나 제도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많은 문제점들이 떠오른다.
근본적(根本的)인 해결책(解決策)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그 가능성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해외입양(海外入養)이 문제되고 국내입양(國內入養)이 신통치 않은 현실도 주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입양을 꾸짖고 나무라지만 그렇다고 묘책(妙策)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국회의원들도 해외입양의 부당성(不當性)을 신랄하게 지적하지만 보사부장관 재직 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장관이나 국회의원 중에서 입양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지도층의 실정이 그러하니 해결책이 간단하게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미혼모(未婚母)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전쟁 동안에는 전쟁고아가 생기게 마련이고 전쟁을 핑계로 삼았는데 전쟁 중이 아닌 요사이에도 고아문제는 변함없이 대두된다. 그 내용을 보면 참다운 의미의 고아가 아니라 미혼모의 소생(所生)인 경우가 거의 80%를 차지한다는 통계(統計)이다. 그만큼 미혼모 문제는 이제 우리 주위에서 현안문제(懸案問題)로서 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미혼모가 일부 외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상 나라에 따라서는 인구의 5%가 아버지를 모른다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미혼모는 지구상 어디에나 있는 것이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나는 대학생활(大學生活)을 하였을 때 1965년부터 10년 동안 도시(都市)인구에 관한 의학적 연구에 몰두(沒頭)한 시절이 있었다. 여러 가지 테마로 연구를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혼전임신율에 관한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이 도덕이 문란한 시절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사통계(調査統計)를 들어보니 혼전 임신율(婚前 姙娠率)이 20%에 가깝다. 아마도 조사상의 착오가 있었겠지 하고 재차 조사를 실시하였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수치(數値)가 밖으로 나가서 한 때 사회적으로 물의가 생긴 일이 있었다.
혼전임신(婚前姙娠)과 미혼모는 별개의 것이지만 도덕이나 윤리의 측면에서는 상호간에 전연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닌 줄로 안다. 사회의 도덕개념이나 윤리성이 추락한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냉엄하게 관찰하고 우리의 좋은 점을 되살리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보사부에 봉직하였을 당시 우리나라의 연간 기아(年間 棄兒)의 수는 약 1만3천명이었다. 이 중 7~8천명이 국외로 입양되고 나머지는 국내에서 입양되거나 시설(施設)에 수용되었다. 아기들을 팔아서 외화(外貨)를 버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짓이라고 소리를 높이기도 하였지만, 앞서 적은 바와 같이 국내입양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모 국회의원은 고아원(孤兒院)을 많이 증축(增築)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간(年間) 수십 동(棟)씩 고아원을 짓는다고 해서 이 문제가 풀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가계(家系와 혈통(血統)을 중시(重視)하는 우리들의 관습으로는 외국인의 입양관념(入養觀念)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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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 보사부장관 / 앞줄 왼쪽부터 김판술, 고재필, 신현확,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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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기를 입양한 외국인 양부모가 심심치 않게 문안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입양한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며 학교성적도 좋다든가 자신이 한국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서 한국에 관한 교육을 별도로 시키고 있다는 등의 편지 사연이다. 대개는 사진을 동봉해 온다.
미국에서 연구(硏究)중인 어느 한국(韓國)출신 학자로부터 미국에 입양되어 있는 어린이와 국내입양 어린이를 비교 연구 하겠으니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사회복지분야(社會福祉分野)에서 일하고 계신 몇 분과 상의하였더니 펄쩍 뛴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양자녀에 관한한 아무것도 밝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친부모라고 알고 있는데 별안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야말로 비극(悲劇)이 생긴다는 것이다.
해외입양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국내입양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건 국내입양을 권장하여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과제이다.
한편 올바른 성교육(性敎育)과 더불어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회복시켜야 하는 과제 또한 미혼모나 기아 내지 고아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전제가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미혼모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데 입양문제를 거론하다보니 문득 미국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의 암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임종식(林鍾湜) 박사가 생각이 난다. 임(林)박사는 57년에 서울의대를 졸업했으며 오랫동안 Washington에 가까운 Bethesda 소재의 보건원에서 빛나는 연구업적을 내고 있는 암(癌)학자다. 나는 그의 연구소와 자택을 몇 차례 방문을 한 일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만나 본 일이 있다.
부인은 영국계 미국인인데 동양식 부덕을 지니고 있는 현모양처형의 숙녀이다. 두 분 사이에 아드님만 네 명이 있는데 이들도 부모님을 닮아서 그런지 아주 동양적이다. 부인은 가정주부로서 훌륭할 뿐만 아니라 미취학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학교의 장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에게는 아들만 있는 처지여서 숙원의 하나가 딸을 갖는 것이었다. 양녀를 구하려는 생각으로 82년 늦은 봄에 부인이 서울에 왔었다. 부인은 전에도 시댁에 문안드리기 위해 서울에 오곤 했는데 82년 내한 때에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서울 근교의 고아원을 찾아가서 양녀가 될 어린이를 물색한 것이다. 결국 마음에 드는 어린이를 발견하고 입양수속을 밟았다고 한다. 수개월 후에는 Bethesda 댁으로 오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해 여름 서울 일대에 시간당 300mm가 넘는 집중 호우(集中 豪雨)가 있었다. 특히 안양(安養) 유원지 근방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폭우가 있은 후 거의 1개월이 지난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임(林)박사로부터 간곡한 내용의 편지가 날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입양녀(入養女)가 폭우 때문에 실종되었다는 고아원소식을 받고 부인이 거의 실신상태에 빠져 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도대체 믿으려고 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이 비싼 값으로 자기 양녀를 딴사람에게 팔았다고 야단한다는 내용이다. 자기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서울대 총장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편지형식으로 써서 부인 앞으로 보내줬으면 하는 부탁이었다.
편지를 받고 나도 놀랐다. 곧 안양유원지(安養遊園地)로 갔다. 복구사업이 진행 중이었지만 그 참상은 참으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부락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집채만한 바위들이 수없이 굴러 내려와서 사람이고 집이고 몰살했다는 것이다. 입양하기로 되어 있던 어린이에게는 할머니가 계셨던 모양이다. 곧 미국으로 보내야 하니 할머니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할머니는 손녀를 데리고 유원지 위쪽에 있던 암자를 찾아가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별안간에 집중폭우가 쏟아져서 암자고 사람이고 흔적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임(林)박사 부인에게 자세한 편지를 썼다. 임(林)박사로부터 다시 편지가 왔다. 부인이 내가 쓴 편지를 믿으려하지 않으니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운 시일 내에 미국을 방문하고 자기 부인을 만나줬으면 하는 애원조의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무렵에 나는 미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었다. 나는 Bethesda로 가서 임(林)박사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 자기 딸이 세상을 떠났느냐고 묻고 또 묻는다. 전후 사정을 여러 차례 설명했다. 억지로 납득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 맙소사 왜 하필이면 내 딸을 데려 가시나요”하고 울부짖었던 부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후 나는 Bethesda를 방문할 기회가 없었으나 임(林)박사와는 가끔 교신이 있다. 다른 양녀를 맞이하여 가정 분위기가 대단히 즐겁게 되었다는 소식도 여러 차례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