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근(金正根) 형의 실종(失踪)...

서천병원(舒川病院)에는 8월 12일 입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가출한지 1주일만의 일이다. 어떻게 서천(舒川)까지 갔는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다. 병원에서도 여러 차례 도주했었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극심한 치매증으로 기억력이 전연 없는 처지였으니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진을 18만 매나 뿌렸다고 하니 그 정성이 그래도 김(金)형을 찾게 해준 셈이다. 실종된 지 두 달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나는 불길(不吉)한 느낌에 사로잡혔었다. 이제 시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김(金)형은 없어졌구나 하고 슬퍼하기만 했다.

10월 14일에 발인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두 딸 수지(聖惠<성혜>)와 페기(京惠<경혜>)가 귀국한다 하여 발인은 15일로 연기하였다. 나는 아내와 같이 14일 날 밤늦게 빈소를 방문하고 김유후(金有厚) 사정수석과 밤늦도록 이야기 했다. 김(金)수석은 재치 있고 경륜이 많은 수재형 인물이다. 아들이 없는 김(金)박사에게 김유후(金有厚)씨는 그 바쁜 일정에도 아들 대신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8월 5일 저녁 8시경 대문소리가 나기에 부인이 쫓아 나갔는데 김(金)형의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쫓아 갈 수가 없는 정도였다. 결국 제동(齊洞)길을 내려와 창덕여고 앞 지하도로 들어간 후 김(金)형을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부인은 황급히 귀가하여 김(金)형을 시중하던 파출부 내외(남편은 운전기사)를 데리고 나와 수색을 시작했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인천(仁川) 경기도(京畿道) 일원을 대상으로 수색을 했다. 서울의 경우에는 특히 종로(鐘路)서장이 중심이 되어 철통같은 수색을 실시했고, 경찰청에서는 전국에 수사를 지시했다. 한편으로는, 사진이 들어있는 전단도 18만매를 뿌리고 지하철역마다 사진을 붙였고 신문에 사람찾기 광고도 냈건만, 별로 소득이 없었다. 쉴 사이 없이 김(金)박사를 봤다는 전화가 걸려 와서 김(金)박사가 서울에 있는 줄로 생각했다.

▲ 1994년 자랑스런 서울시민 600인 선정패를 받았다. 앞줄 왼쪽부터 궘숙표 박사, 나, 김일환 장군, 한 사람 건너 백선엽 장군, 정광모 여사 (크라운 호텔)

10월 10일(토요일) 저녁에 결정적인 전화가 걸려왔다. 제보자의 부친이 충남 서천(忠南舒川)에 있는 병원에 입원중이어서 약 한 달 전에 병실을 방문했더니 자기 부친 옆에 누워있는 환자가 특이한 행동을 하더라는 것이다. 링거주사를 꽂아도 빼버리곤 하여 이상스럽게 느꼈다 한다. 약 1개월 후에 서울의 지하철역에서 본 사진이 꼭 그를 닮았다고 믿어져서 알리는 것이라며 한 달 전의 일이어서 아직 그 분이 병원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부인과 천주교신자 한 분이 서천으로 달려가서 병원을 방문했다. 환자는 이미 없었다. 병원기록에는 김정근(金正根), 8월 12일 입원, 60세, 소화불량으로 되어 있었다. 대천(大川) 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경찰관이 입원시킨 것으로 판명되었다. 병원에서 도주하기도 하였고 갱생원(更生院)이나 복지관(福祉舘)을 통해서 다시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부인 일행은 장항(長項)으로 가서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복지관을 통해서 조치원 제일병원(鳥致院第一病院))에 있다는 단서를 얻었다.

12일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피골이 상접한 김(金)박사가 누워 있는 것이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실패했고 눈물만 흘리더라는 것이다. 의치(義齒)도 없어져서 먹지도 못하여 영양상태가 극도로 악화된 모습이었다. 앰뷸런스로 서울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에는 연락이 되어 입원실도 준비되어 있었다. 응급실에 도착하기 전에 눈물을 다시 흘리더니 운명하고 말았다고 한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생이었다. 누구보다도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던 김(金)박사의 종말이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예측 했겠는가?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사망하기 전에 발견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 아니었느냐 하고 자위하였다. 만일에 찾지 못했으면 어쩔 뻔 했나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곤 하였다.

발인은 15일에 있었다. 넷째 형인 김형근(金亨根)씨가 마련한 여주(驪州) 묘지에 안치되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장녀 명혜(明惠)양에게는 그간의 사정을 알리지 않았고, 운명한 날 밤에야 연락이 되어 서울대학병원 영안실로 뛰어왔다. 미국에서 거주 중인 차녀 수지(聖惠)와 페기(京惠)도 14일 귀국했다. 흩어져 살던 세 따님 앞에서 땅에 묻히게 되었으니 그래도 한결 홀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김유후(金有厚)씨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에는 우리들이 모르는 성인(聖人)들이 많다는 것이다. 걸식하는 사람의 수염을 깎아주는 사람, 식사를 제공해 주는 사람, 병원이나 복지시설에서 대소변을 처리해 주는 사람, 이러한 성인들이 예상 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수색하는 동안에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김(金)박사가 결코 사망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김(金)씨의 변이다. 이름 모르는 성인들이 많기 때문에 이 사회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형제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형근(金亨根)씨도 93년 8월 21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