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일 때문에 가가대소 하는 경우가 흔하게 있다. 나는 이러한 예를 희극화(喜劇化)하고 유쾌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사실상 이런 일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다음에 몇 가지를 적어본다.
1992년 4월 26일 저녁 4시 50분에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였다. 나이로비 방문을 마치고 파리를 거쳐서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것이다. 6월에 브라질 Rio de janeiro에서 열리는 UN 환경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UNCED)에 대비하기 위한 개발도상국(開發途上國) 환경장관회의(環境長官會議)에 참석할 목적이었다. 비행장에서는 현지의 이상구(李常九) 대사, 최영철(崔泳喆) 건설관, 장철균(張喆均) 참사관, 이준규(李俊揆) 서기관 등 대사관 직원, 본회의에 앞서 열리고 있던 실무자회의에 참석 중이던 우리 환경처 조병환(趙炳桓) 평가조정실장, 외무부의 정래권(鄭來權) 과장, 말레이시아 환경차관 등의 영접을 받았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마련한 외빈차(外賓車)에 이(李)대사와 함께 동승했다. 차에는 태극기가 달렸고 사이드카가 위세 좋게 선도(先導)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중도에서 고장이 난 것이다. 앞에서 선도하던 사이드카는 보이지 않는다. 뒤따라오던 우리 대사 전용차로 옮겨 탔다. 약 40분 후에 예약된 호텔(Crown Princess Hotel)에 도착했다. 정차(停車)중이어서 캄캄했다. 겨우 호텔 로비의 일부에 전등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니 비상발전기의 규모가 작은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도 가동되지 않아 로비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李)대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밤 8시에 환경장관 주최 만찬회가 있어서 그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었다. 예약된 방은 20층에 있었다.
얼마 후에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10층까지 운행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일행과 함께 10층까지 간 후 10층을 걸어서 올라갔다. 촛불을 켜고 기다렸으나 전등은 켜지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만찬회에 참석해야 하니 먼저 귀가하도록 대사에게 권했다. 8시가 되어도 정전은 계속되었다. 함께 있던 대사관의 최(崔)건설관과 이(李)서기관이 근처의 한국식당으로 가자고 한다. 이들의 안내로 환경처의 일행과 함께 8시 반쯤 식당으로 갔다. 제법 깨끗하게 차려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예비회담이 있었다. 아마도 그 전날에 있었던 해프닝에 관하여 사과(謝過)인사가 있겠거니 했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회의를 주재하였던 말레이시아 과기환경처 장관 Law Hieng Ding씨는 이 사건에 대하여 한 마디의 사과나 해명도 하지 않았다. 오후 3시에 개회식이 있었고 Mahathir bin Mohamad 수상의 연설이 있었는데 역시 전연 언급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사과도 사과려니와 해당자는 문책되었을 것이다. 피차의 습관이나 문화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6월 3일부터 14일까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UN환경개발회의가 있었다. 정원식(鄭元植) 국무총리를 단장으로 하여 대표단이 구성되었으며, 나도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정(鄭)총리는 7일 출국하여 São Paulo에서 공식 일정을 마치고 나보다 하루 뒤에 도착하였다. 나는 8일 출국하여 New York를 거쳐 Rio로 갔다. Rio Atlantica라는 호텔에 투숙했는데 총리 내외분의 방은 바로 내가 묵고 있던 방과 인접해 있었다. 매일 아침 일정에 관한 회의가 있었으며 40㎞나 떨어진 회의장에 함께 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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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원식 국무총리 주재로 국제연합(UN) 환경개발관계장관회의를 하고 있다 (1992. 5.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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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주재 한철수(韓哲洙) 대사 내외분의 정성이 대단하였다. 리오데자네이로에는 영사관이 없어 대사로서는 손발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김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한국 음식을 준비하는 등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상파울로 주재 김종민(金鐘敏) 총영사는 왠지 우울해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사연이 있었다. 정(鄭)총리가 상파울로에 도착하던 날 비행기가 예정보다 25분 빨리 착륙했다고 한다. 브라질의 의전관(儀典官)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김(金)총영사는 이 일을 몰랐다는 것이다. 훨씬 후에 연락을 받고 비행기 쪽으로 가보니 이미 총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막 비행장 건물로 떠나려는 참이었다. 총영사와 의전관은 버스로 올라가서 사과했다.
그런데 이 일이 서울에 알려져 총영사(總領事)의 영접차질이라고 보도되었다. 총리에 대한 결례를 문책하기 위해 총영사를 서울로 소환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니 총영사가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총리에게 총영사를 문책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다. 총리도 같은 뜻을 갖고 있다며 서울에 이미 그 뜻을 전했노라고 하였다. 총영사를 직접 만나서 격려해주라는 부탁도 있었다. 나는 총영사를 내가 묵고 있는 방에 오도록 하여 총리의 뜻도 전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좋겠다고 격려했다. 총영사는 대단히 기뻐했다.
6월 15일 아침 총리일행과 나의 일행은 비행장으로 떠났다. 총리는 아르헨티나 공식방문차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고 나는 이구아수(Iguasu)폭포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총리보다 한 시간 후에 떠나게 되어 있었다. 총리는 귀빈실(貴賓室)에 들러서 환송객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게 되어 있었고, 나도 귀빈실에서 총리를 전송할 계획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비행장에 도착하자 건물 쪽으로 가지 않고 비행기트랩 옆에 차를 세운다. 브라질의 의전관도 있었고 에스코트도 있었다. 총리는 환송인사들과 만나지도 못한 채 트랩에 올랐다. 나는 비행장 귀빈실로 갔다.
브라질의 의전은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나도 직접 경험을 한 셈이다. 주위의 인사들은 총영사의 억울함을 알아주어야 한다고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귀국 후에 이상옥(李相玉) 외무장관에게 총영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다. 이(李)장관은 일단 언론에 보도되었고 차질이 생겨서 총리에게 결례가 된 것이 사실이라고 하며 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때는 이미 조치가 취해졌던 것으로 후에 전문하였다.
프로토콜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지만 이구아수폭포 방문이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폭포는 Foz do Iguasu시의 동남쪽 10㎞거리에 있다. 비행기 편으로 상파울로에서 1시간 반, 리오에서는 2시간의 거리이다. 우리 일행(이규용(李圭用) 비서관, 노부호(盧富鎬) 지구환경과장, 민병철(閔丙鐵) KBS차장)은 리오에서 출발하여 상파울로를 거쳐 이곳으로 갔다.
폭포 바로 옆에 있는 Tropical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점심을 마친 후 브라질 측의 폭포를 구경하였다. 듣던 대로 정말로 장관이었다. 250여개의 폭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마 전에 있었던 홍수로 수량이 늘어나 3, 4개의 폭포가 하나의 폭포로 변해 있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웅장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감탄을 연발하면서 폭포를 구경하였고 이구아수시에서 약 20㎞떨어져있는 ITAIPU수력발전소로 떠났다. 이구아수시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교포 한 분이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안내해 주었다. 약 20년 전 10세 때에 브라질로 이민 와서 상파울로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젊은이였으며,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는 설명을 해주었다.
이 수력발전소(水力發電所)는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크며 1,260만 kw/h를 출력한다.
먼저 사무실에서 30분짜리 기록영화를 관람하게 한 후 7대의 버스에 분승시켜 댐과 수력발전소를 보여준다. 대단한 규모이다. 마치 바다와 같았다. 댐의 길이가 8㎞, 높이가 최고 185m, 저수지 면적 1,350㎢, 저수량이 2,010억㎥, 물의 배출량(排出量)은 매초 5만 8천㎥이며 이구아수폭포의 약 30배가 된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두 나라가 합작(合作)하였으며 18기의 터빈을 양분해서 9기씩 갖고 있다한다. 그러나 파라과이는 1기에서 생산되는 전력만으로 충분한 까닭에 나머지 8기의 전력을 브라질로 판매한다는 설명이었다. 브라질 전력의 60%가 이 발전소에 의해서 충당된다고 하니 그 대단함을 상상할 수 있다. 1975년에 착공하여 1984년에 가동되기 시작한 이 발전소는 브라질의 명소가 아닐 수 없다.
약 한 시간에 걸쳐서 발전소와 댐을 보고 사무소에 돌아오니 소장과 직원 수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기념식수(紀念植樹)를 부탁한다고 한다. 기록영화를 관람한 후 댐에 가지 않고 사무실에 남아서 취재를 하던 KBS 민(閔)차장을 통하여 내가 온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사전에 연락을 취했으면 특별대접을 했겠는데 미안하게 됐다고 한다. 전날에는 중국의 이붕(李鵬) 총리가, 그날 오전에는 호주의 Roslyn J. Kelly 환경장관이, 그리고 40분 전에는 Uri Marinov 이스라엘 수석대표가 기념식수를 했다고 설명한다. 나는 그분들이 말하는 대로 하였다. 이미 구덩이가 파져 있었고 준비된 나무를 심기만 하면 되었다.
식수(植樹)가 끝나자 이스라엘 수석대표인 Marinov 박사가 다가와서 정답게 인사를 한다. 40분이나 기다렸다는 것이다. Rio회의에 관한 이야기,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의 환경 이야기 등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런데 이스라엘 대표가 무엇 때문에 40분 동안이나 나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인 것 같다.
Tropical호텔에서 보낸 하룻밤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우르릉 하는 폭포의 굉음이 창을 계속 흔든다. 이구아수가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경험이다. 다음날 아침 아르헨티나 측의 폭포를 보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떠나기 직전에 호텔직원 한사람이 차에 타고 있던 우리들에게 다가오더니 1천 원짜리 한국 은행권을 보이면서 미국불로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 1불 20센트 정도라고 하였더니 낙심천만인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한 10불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팁으로 주었거나 물건 값으로 준 것임에 틀림없다. 그때 그 사람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한국 관광객에 속았다는 인상이었다.
사무소 앞에서 폭포를 견학하고 되돌아가는 데는 2시간이 걸린다. 강물이 떨어지고 있는 폭포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형용하기 힘들다. 눈 아래로는 브라질 쪽의 멋있는 전망대가 보인다. 더욱이 폭포를 훌륭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무지개다리이다. 태양이 떠있는 동안에는 어디서나 무지개를 볼 수 있다. 이구아수 뿐만 아니라 시간만 허용했다면 아마존 여행도 하고 싶었던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환경행정을 맡고 있는 사람이 브라질까지 와서 아마존도 가보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가 아니냐고 하던 모 인사의 말이 생각난다.
이구아수폭포가 이 세상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장관이라는 것을 누구나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지적하는데 나도 이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을 방문한 일을 대단히 뜻 깊은 경험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구아수폭포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상파울로의 김(金)총영사가 떠오르고 Tropical호텔 직원의 표정이 회상된다.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