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직(敎授職)과 서리직(署理職) (162회)
  제20장 수상(隨想)

언제나 말하지만 이 세상의 직업 중에서 교수직(敎授職)같이 훌륭한 것이 없다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한다. 물론 교수(敎授)도 교수 나름이지만 어쨌든 교수직이 존경받는 직업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한때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교수가 학생으로부터 삭발(削髮)을 당하고 폭행(暴行)을 당하기도 한 일이 있었다. 민주화를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한데서 생긴 비극이었다. 그러나 교수(敎授)는 어디까지나 교수이고 교권(敎權)은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79년 5월부터 80년 6월까지 1년 1개월 동안 서울대학교 병원장직을 맡은 일이 있다. 당시 서울대학교병원은 특수법인(特殊法人)이었으며 구 서울의대부속병원이 모체였던데 관하여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부속병원장직을 맡아 오던 김홍기(金弘基)선배가 초대병원장으로 취임하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김(金)선배는 교수직을 내놓고 특수법인 서울대학교병원장에 취임하셨다. 말하자면 전임직으로 되신 셈이다.

내가 어떤 이유에서 원장에 지명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79년 5월 어느 날인가 기억이 분명치 않은데 서울의대 교수세미나가 ‘하얏트’호텔에서 열리고 있었고 나도 참석하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대총장이던 윤천주(尹天柱) 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급하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일식당 ‘남강(南江)’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약속된 데로 갔더니 윤(尹)총장이 먼저 와계셨다. 이야기의 내용은 병원장으로 지명되어 곧 이사회(理事會)가 열리게 되어 있으니 그리 알라는 것이다.

임상가(臨床家)가 아닌 필자로서는 당황치 않을 수 없었다. 임상지식이 없는 자가 어찌 이 큰 병원의 원장직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사양했다. 며칠 후 자기는 임기만료로 총장직을 떠나게 되는 몸인데 총장으로서는 최후 전달사항이니 아무 말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께서 지명한 것이니 자기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부언하신다.

이렇게 해서 병원장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교수직을 버리면서까지 이 일을 맡아야 하는 것이냐이다. 교수직을 그대로 갖고 싶으니 원장이 아니라 병원 서리직(署理職)으로 해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박찬현(朴瓚鉉) 선생은 대통령께서 서리(署理)에 대한 발령을 내시는 일이 화제에 올랐다고 귀띔해 주기도 하였다.
 
▲ 역대 서울대 병원장 / 왼쪽부터 홍창의, 이영균, 김성환, 김두종, 김홍기, 필자 전임 원장들. 뒤에 서 있는 분은 한용철 원장 (대원각에서 1987. 6.3.)

이와 같이 하여 교수직을 고수했고 다음 해 6월 서울대학교총장으로 취임했을 때에는 원장직을 보직으로 하여 교수직을 그대로 갖도록 하였다. 김홍기(金弘基) 선배께서는 원장직에서 물러난 후 교수직으로 복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한심석(韓沁錫) 총장의 경우에도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했다. 한(韓)총장은 4년 임기를 원만히 마치신 후 서울대 역사상 처음으로 중임(重任)되셨는데 얼마 안가서 학생시위사건으로 인책퇴임하시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총장이 되면 자동적으로 교수직이 상실되는 까닭에 총장직에서 물러나면 무직이 된다.

한(韓)총장의 뒤를 이어서 내가 서울의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한(韓)총장께서 총장직을 물러나셨을 때에도 나는 학장직에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韓)총장이 교수직으로 복귀하도록 해 올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는데 만만치 않았다. 때마침 소위 교수재임용제도(敎授再任用制度)가 시작되어 이 문제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했는데도 한(韓)총장이 교수에 복직하시는데 만 1년이 걸렸다. 다시 교수로 되신 후에 흰 가운을 입으시고 기뻐하시던 한(韓)총장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80년 6월 23일 나는 병원장 자격으로 고창순(高昌舜) 부원장과 함께 일본여행을 떠났다. 세계보건기구후원으로 일본의 병원관리(病院管理)상황을 시찰하는 내용의 2주일 간 여행이었다. 일본 도착 다음 날인 24일에는 후생성(厚生省)을 방문토록 되어 있어, 사무차관과 의무국장을 방문했다.

오후에는 시간의 여유가 생겨서 도쿄(東京)대학의학부의 위생학교실을 방문했다. 주임교수이던 야마모토(山本俊一)교수는 오랜 지기이며, 학교는 다르지만 졸업년도도 같고 연령도 같았기 때문에 도쿄(東京)에 갈 때에는 언제나 만나보곤 했다. 야마모토(山本)교수하고 환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고난 야마모토(山本)교수가 나에게 서울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니 걸어보라고 하며 통화 중에서 들은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대단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교환에게 부탁해서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장관실(長官室)이라고 하며 조금 기다리면 장관께서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 여직원이 말한다. 무슨 장관이냐고 물으니 문교부장관이라고 한다. 더욱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출국하기 3일 전에 장관실로 가서 출국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이규호(李奎浩) 문교부장관이 전화에 나왔다. 급한 일이니 내일 첫 비행기로 귀국하라는 지시였다. 다음날은 치쿠젠(筑坡)대학에 가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2, 3일 후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이야기다.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옆에 있던 고창순(高昌舜) 교수에게 사정을 말하니 무엇인지 큰 일이 있음직하다는 예감이 든다고 한다.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이 야마모토(山本)교수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내일 뜻하지 않게 귀국하게 되어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하니 몹시 서운해 한다.

일본통(日本通)인 고(高)교수가 동행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이번만은 마음껏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런 전갈이 오고 보니 부풀었던 꿈이 산산조각이 난 셈이다.

다음날 고(高)교수만 치쿠젠(筑坡)대학으로 가게하고 나는 귀국하였다. 고(高)교수도 치쿠젠(筑坡)대학을 끝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도착 즉시 문교부장관실로 갔다. 서울대총장(總長)으로 내정되어 곧 국무회의에서 의결될 것이니, 그리 알고 대기하고 있으라는 분부였다. 이것이 즉시 귀국의 이유였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이(李)문교부장관과 김용휴(金容烋) 총무처장관이 배석하였다. 대통령께서는 총장직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을 주셨고 나의 의견을 물으셨다. 나의 건의사항의 하나가 부총장(副總長)의 보직문제였다. 국립대학의 부총장은 임기 2년의 전임직이기에 총장을 돕는데 힘든 점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 보직(補職)으로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부총장을 지낸 분들의 고민을 잘 알고 있었던 처지여서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진행되었다. 내 자신이 관련되는 문제인 까닭에 차마 총장을 보직으로 하도록 하자는 건의는 올릴 수가 없었다. 총장직(總長職 )을 떠난 후 난처한 입장을 겪게 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아 온 까닭에 나의 입장에서는 총장 보직제가 바람직하기는 하였지만, 의견을 제시하기 힘들었다.

부총장 보직제를 위한 규정개정을 약속받고 개정될 때까지는 부총장 서리(署理)로 한다는 것도 합의되었다. 얼마 후 당시 사회과학대학장(社會科學大學長)이던 이현재(李賢宰) 박사를 부총장으로 기용했는데 처음에는 부총장 서리로 임명을 받았고 규정이 개정됨에 따라 서리(署理)라는 꼬리가 떨어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잘 처리된 조치였다고 사료된다. 어쨌든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교수직을 보유하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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