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으로 회상된다. 아직 우리나라와 이집트가 국교를 맺기 전의 일이다. ‘이집트’에서 3명의 예방의학교수가 내한하였다. 2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 교수였다. 외무부로부터 이들을 극진하게 대접해 달라는 전갈이 있었다.
나는 이들을 성동구보건소(城東區保健所)로 안내하였다. 당시 나는 ‘도시인구에 관한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였으며, 성동구보건소가 이 연구사업의 현장사무소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보건소장인 구도서(具燾書) 박사를 비롯하여 연구원들이 참석한 회의실에서 나는 내빈 세 분을 소개하고 곧 브리핑에 들어갔다. 첫 번째 제목은 임신부가 분만(分娩)하기 전에 보건소를 방문하고 검진을 받은 내용의 것이었다. 한참 설명을 하고 있으려니까 이집트 교수 한 분이 질문이 있다고 한다.
연령을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이다. 임산부를 연령군 별로(예 20~24세군, 25세~29세군 등) 분류하고 그들의 임신월수와 보건소를 방문하는 빈도와의 상관관계(相關關係)를 그린 도표를 놓고 설명하는 중이었다. 나는 양력(陽曆)과 음력(陰曆)의 문제인줄 생각하고 이 문제는 어렵지 않다고 말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쪽이 다 사용되기는 하지만 상호간에 환산표가 있어서 즉시 알 수 있다고 부연하였다.
그랬더니 질문자는 음력, 양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연령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좀 당혹했다. 내가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의심했던 까닭이다. 출생하면 출생신고를 하고, 호적(戶籍)이 마련되어 있으니 연령이야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그랬더니 질문자는 한국에 그런 제도가 있느냐고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이집트’의 사정을 물었더니 ‘카이로’를 중심으로 이 제도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다는 답변이었다.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빛나는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이집트’가 그런 줄은 몰랐다. 이런 질문을 받고 나니까 맥이 풀렸다. 그 다음부터는 대략적으로 중점만 설명하고 끝냈다.
보건소에서 나온 후 남산(南山) 팔각정으로 안내하였다. 당시에는 외부손님을 대접하는 코스로 되어 있었다. 팔각정 앞뜰에는 1분 만에 현상되어 나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다. 촬영을 부탁했다. 1분 만에 현상된 사진이 나왔다. ‘이집트’손님들은 몹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폴라로이드’를 처음 보는 모양이다. 이런 카메라가 흔하냐고 묻는다. 우리 집에도 있다고 하니까 말이 없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시가는 아름답다. 물론 당시에는 강남(江南)지역은 없을 때이다. ‘이집트’손님은 아름답다고 연발한다. ‘스위스’보다 아름답다고 아부하기도 한다. 약한 자에 강하고 강한 자에 약한 모습이다.
그날 저녁 ‘코리아 하우스’로 모셨다. 한국식 식사가 끝난 후 관광영화를 관람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영화이다. 제주(濟州)의 천재연(天宰淵) 폭포가 나왔다. 금강산 폭포냐고 묻는다. 설명을 해준 후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평양(平壤)이나 금강산(金剛山)에 가보았냐는 질문이었다. 가본일은 없지만 ‘카이로’에서 여러 차례 영화를 관람했다는 답변이었다. 북쪽이 선전활동을 대단하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에서 아직도 정확한 출생률이나 사망률이 계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이다. 특히 후진국에 있어서는 그 양상이 심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정확한 출생률이나 사망률이 계산되고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출생이나 사망의 건수(件數)는 있지만 신고누락(申告漏落)의 경우가 상당히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그러니 정확하게 인구수를 파악한다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나라에 따라서는 생일(生日)은 물론 연령(年齡)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지구 전체적으로는 이런 부류의 인구가 6분의 1정도 될 것이라고 추계되기도 한다. 오늘날 지구의 총인구가 64억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계숫자이다.
본제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이집트’이야기가 나오니 바드란(Ibranim Badran) 박사의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서울의대 학장이던 73년 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당시 Badran 박사는 ‘카이로’대학의 부총장이었는데 부인과 의대학장을 대동하고 서울을 4일간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서울에 체재하는 기간 중 나에게 돌보라는 지시가 있었다.
예정시간에 김포(金浦)비행장으로 출영했다. 당시 문교부장관은 민관식(閔寬植) 선배였는데 문교부에서도 직원이 나왔고, 서울대 본부에서도 황인철(黃仁哲)형(나와 중학교 동기)이 나와 있었다. 비행기는 이미 도착한지 오래 되었는데 일행이 나오지 않는다. 약 40분 후에 일행이 나타났다. 표정이 대단히 굳어져 있으며 제대로 인사도 받지 않는다. 나는 Badran 박사 내외를 모시고 조선(朝鮮)호텔로 떠났다. 의대학장은 황(黃)형 일행이 안내하였다. 호텔에는 스위트룸이 마련되어 있었고, 실내에는 민(閔)장관으로부터 보내온 화분이 놓여 있었다. 호텔에는 저녁 8시가 지나서 도착하였기 때문에 그날은 일부러 공식 만찬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내외분과 의대학장 일행이 홀가분하게 쉬라고 인사를 하고 다음날 아침에 모시러 오겠다고 하였다. 공항(空港)으로부터 오는 동안에도 별로 말이 없었던 Badran 박사는 호텔방 밖으로 나가도 괜찮으냐고 묻는다. 물론이라고 답하고 호텔 내에서는 어느 식당이고 좋으니 마음에 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라고 권하였다. 식사 후에 산책을 할 생각이 있으면 어디든 좋다고 말하고 필요하다면 호텔 종업원이 안내를 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하고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물론 나는 호텔관계 인사에게 차질이 없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중이나 돌아온 후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Badran 박사 일행의 표정이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그렇게까지 무표정(無表情)할 수가 있느냐는 생각과 결례가 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예정시간에 호텔로 갔다. 표정은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왜 그런지를 물어볼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학장실(學長室)로 안내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끝에 우리 교수들에게 특강(特講)을 한다는 결론을 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Badran 박사가 ‘이집트’대학의 부총장이며 대통령 주치의라는 것을 알았다. ‘이집트’ 외과학의 거두이며 오랫동안 의과대학 교수로 활약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강에는 한 시간이 할당되었는데, 두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참석한 교수들도 진지했다. Badran 교수가 가져온 슬라이드도 수십 장이었다. 대단한 능변가였다. 특강이 끝나자 그 표정이 다소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날 저녁은 한심석(韓沁錫) 서울대총장이 조선호텔에서 마련한 만찬회가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인은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 처음부터의 계획이었다. 나는 집사람에게 부탁하여 부인에게 관광안내를 해주고 워커힐호텔에서 저녁을 한 후에 성북동(城北洞)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만찬회 석상에서는 주로 ‘카이로’의과대학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학생수가 3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만찬회가 시작되기 전에 신문기자 한사람이 찾아와서 Badran 박사에게 몇 가지를 물었지만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찬회가 끝날 무렵 나는 Badran 박사에게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우리 집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예상외로 Badran 박사는 기뻐하는 눈치였다. Badran 박사와 학장을 데리고 성북동(城北洞) 집으로 가보니 부인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정경이 벌어졌다. 이제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밤늦게까지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나는 비로소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직접 서울로 온 것이 아니라 평양(平壤)을 방문하고 홍콩을 통해서 서울로 왔다고 한다. 평양에서는 서울로 가지 말라고 몇 번씩이나 강권하면서 만일에 서울로 가면 당신네들의 목숨은 없게 되는 것으로 알라고 협박하더라는 이야기다. 그런 말을 들으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포(金浦)비행장에 도착해 보니 평양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사실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통관(通關)할 때에 북에서 준 홍보용 책자가 가방에서 나오니까 압수한다면서 빼돌리더니 출국할 때까지 보관한다고 무서운 눈초리로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방문목적 등에 관하여 샅샅이 물으면서 상당히 협박조의 말투를 쓰더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니 평양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오르게 되고 공포감에 사로잡히더라는 것이었다.
수수께끼를 풀은 나는 손님들을 최대한으로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Badran 박사는 자기의 방한(訪韓)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거듭 부탁하였다. 다음날 저녁에 그의 방한이 박스기사로 보도되었다. Badran 박사는 하는 수 없다면서도 왜 그런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수년 후에 그는 ‘이집트’과학재단 이사장의 자격으로 내한한 바가 있었다. 우리들은 첫 번 방한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구회(舊懷)를 나누었다. Badran 박사는 그 동안 보건사회부장관 등 요직을 맡으면서도 대학에 대한 봉사는 계속해 왔다고 털어놓았다.
92년 6월에 있었던 브라질 Rio 환경회의 때 ‘이집트’환경장관을 만나서 양국의 협력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Badran 박사의 안부를 물으니 건재하며 잘 뛰고 있다고 알려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