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애폴리스 추억(追憶)_1 (164회)
  제20장 수상(隨想)1

1955년 9월 미네소타대학교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에 입학하였는데, 그 당시 나는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의 펠로우였다. 마침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이 해부터 많은 교수가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미니애폴리스’에 있었던 기간 중 보건대학원의 교수 학생들과 더불어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당연하다. 미네소타 보건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고 MPH학위를 취득한 학생은 28명이었는데, 이 중 미국인이 12명이었고 나머지는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대만‧필리핀‧인도‧중동(中東)에서는 이라크‧이란, 중미(中美)에서는 콜롬비아‧엘살바도르,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브라질‧페루‧칠레 등 여러 나라로부터 와있었다.

이라크학생은 보건차관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가족을 데리고 와 호화롭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일 덕분으로 호강한다고 야유하는 급우도 있었다. 인도학생은 장학금을 받기는 했으나 액수가 적어서 가난이 극심했다. 내가 여러 차례 도와주기도 했다. 남미학생들은 노래와 춤으로 밤을 새우는 장기가 있었다.

①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 교수의 가르침

미네소타 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수강하였을 때 있었던 일들 가운데서 특히 두 가지가 회상된다. 그 하나는 보건학 교육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그라우트(Ruth E. Graut)라는 할머니 교수가 담당했다. 세련된 강의였고 용모도 미인 스타일이어서 자못 인기가 있었다.

하루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일반적으로 발전도상국(發展途上國)일수록 보건에 관한 국민의식이 미약한데 이런 경우에 가장 큰 자극을 주는 것이 콜레라환자의 발생이다. 일단 콜레라가 발생하면 당국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이 긴장하게 되고 보건에 관한 관심이 급속하게 커진다. 이에 따라 예산도 빠르게 배정된다.

나는 이 할머니 교수의 강의를 농반 진반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신성한 강의시간인데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나라에서 직접 이와 같은 경험을 몇 차례 하였다. 그럴 때마다 Graut 교수의 강의가 떠오르곤 했다.

또 하나는 환경보건학사건(環境保健學事件)에 있었던 일이다. 부시(Bush) 박사라는 교수가 담당하였는데, 쓰레기의 위생매립(衛生埋立)에 관하여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으며, 쓰레기를 땅에 묻으면 됐지 뭐 그렇게 요란스럽게 공장시설까지 해가며 떠들썩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공직에서 일하게 된 후에는 가끔 두 분 교수의 강의를 회상한다. 91년 3월에 발생한 낙동강(洛東江) 상류에 대한 ‘페놀’방류사건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사적인 일로 기록될 것이다. ‘콜레라’와 ‘페놀’이 던져준 파문은 대단했다. 불행한 일이고 다시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치 못한다면 더욱 큰 불행이 초래될 것이 분명하다.
 
▲ 시민단체가 낙동강 페놀방류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환경처장관으로 취임한 후 얼마 안 되어 김포(金浦)매립장을 방문했다. 아직 완공되지 못한 때였지만 위생매립지(衛生埋立地)에 관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36년 전에 들었던 교수의 강의를 회상하면서 감회가 교차되었다.

②성(星)박사와의 인연(因緣)

대만학생인 성조탁(星兆鐸) (Chao To hsing)박사는 6척 장신이었는데 1개월 반 동안 나 하고는 이야기를 하려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던 날 저녁을 사겠다고 했더니 좋다고 한다.

‘미니애폴리스’시내의 남경(南京)이라는 중국식당으로 갔다. 그에게 음식주문을 부탁했다. 그런데 성(星 )박사와 종업원 사이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성(星)박사는 북경표준어이고 종업원은 광동(廣東)말이라고 한다. 한자를 써가면서 대화를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성(星)박사가 나를 모르는 척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북경협화의과대학(北京協和醫科大學)(Peking Union Medical College)출신인데, 졸업연도는 나보다 4년 앞선다.

중국인 의사 중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의사의 대부분이 이 대학 출신이었다. 성(星)박사는 중국 고위층의 여성과 결혼하여 북경의 상류사회에서 생활하다가 대만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북경생활 중에 한국인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대개가 부정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일본의 밀정(密偵)노릇을 하거나 아편(阿片)밀수를 일삼는 등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에 대하여는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선입감에서 나를 관찰했는데 그렇지 않다고 느껴서 저녁식사 초대에 응했다는 변명이었다.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해를 풀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성(星)박사는 장제스(蔣介石) 총통 주위의 인물이었다. 김구(金九) 선생같이 훌륭하고 장(蔣)총통과도 가까운 사이인 분이 많은데 왜 한국인에 대하여 옳지 않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런 분들은 예외적일 것이라고 답한다.

이날 저녁을 계기로 성(星)박사와 나는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타이페이(台北)를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타이완총합병원(台灣總合病院)에서 호흡기 내과과장이던 그는 결핵의 대가이며 중화민국방역협회총간사 즉 결핵협회사무총장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고 우리나라에도 몇 차례 내방한 바 있다.

③장애자(障碍者)학교

어떤 동기에서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어느 봄날 Minneapolis 시내에 자리한 장애자 학교를 방문하였다. 색다른 교육현장을 보고 싶다는 심정에서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맹아학교 이외의 장애자 학교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때였으며 장애자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대단치 않았었다. 보건대학원 직원을 통해서 소개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였다. 교사 한 사람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한다. 사무실에 들려 현황설명을 들었다. 정확하게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때 시세로는 엄청나게 큰 예산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 곳을 살펴보았고 새로운 장비에 관한 설명도 들었다. 신체장애(身體障碍)의 내용이 대단히 복잡하고 다기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가장 인상적이고 잊히지 않는 정경의 하나를 소개한다. 양쪽 팔이 없는 소년이 발가락으로 타이프를 치고 있질 않은가. 나는 적이 놀랐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소년이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더 한층 감동했다. 묻는 말에 서슴없이 대답한다.

교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와 같이 명랑할 수 있느냐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성들여 노력하면 불가능이 없다는 답변이다. 이 교사야말로 한 마디로 참스승인 것이다. 참스승에게는 구김살이 없다. 본인이 명랑치를 않은데 어찌 제자들이 명랑하기를 바라겠는가. 40대로 보이는 이 교사가 나에게는 성인(聖人)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문교부에서 일하는 동안에 나는 장애학생들에 대한 특수교육(特殊敎育)을 상당히 구상해 보았다. 그러나 여의치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실정으로서는 발가락으로 타이프를 치는 따위의 특수교육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저 기본적인 수준의 특수교육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구상도 끝내 실현시키지 못했다. 예산과 전문 인력이 주요조건으로 등장하는데 두 가지가 다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보건사회부에서 일하는 동안 장애자에 관한 견문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88년의 장애자 올림픽을 통하여 장애자에 대한 인식은 더 한층 절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대책의 수립은 아직도 미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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