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의 조건(條件) (167회)
  제20장 수상(隨想)

1990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모 전문지에 실렸던 신년 소감을 전재한다.
 

경오(庚午)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모든 난관을 용감하고 슬기롭게 뛰어 넘는 늠름한 마공(馬公)들의 모습은 믿음직하기만 합니다.

우리들은 지난해에 문자 그대로 어려운 한 해를 넘겼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몇 번이고 어려운 고비를 넘겼습니다. 의료계(醫療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해 7월 1일에는 보험이 도시 영세민에게까지 확대되어 전 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제도의 확대에서 파생하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은 제도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과 곁들여져 크고 작은 파동(波動)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의료보험수가(醫療保險酬價)문제, 의료전달체계(醫療傳達體系)문제, 의약분업(醫藥分業)문제 등과 같은 고정 메뉴가 이렇다 할 결론 없이 현안과제로 남아있는 현실을 세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의료보험관리체계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던 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새해에도 계속될 것임을 우리들은 능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들은 ‘자신(自身)을 알자’는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자신의 위상을 옳게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파악하지 않고 남을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자기’는 빼놓은 채 남의 이야기를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다른 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고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많은 사람들이 항상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요인으로 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며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나는 심심치 않게 바람직한 인간상에 관하여 강조합니다. 새해 아침에 ‘바람직한 사람’에 관하여 생각해보는 일이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나만의 의견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지적한 것을 종합해 본 것입니다.

‘바람직한 사람’이란 첫째로 건강(健康)한 사람을 말합니다. 건강의 정의에 관하여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어쨌든 신체적, 정신적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적 건강까지도 모색되어야 참다운 건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을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다른 사람에게 유쾌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은 쉽지만 결코 실천이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不快感)을 주는 인사들이 예상외로 많습니다.

둘째로는 자주적(自主的)인 사람입니다. 자주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아의식과 자율적 의사결정능력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개혁(改革)정신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능력이나 정신이 없는 곳에서 자주적 인간이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셋째로는 창의적(創意的)인 사람입니다. 창의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학습능력과 탐구능력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능력이 없이는 문제해결능력이나 사고력이 발달할 수 없습니다. 문제해결능력이나 사고력이 없는 사람에게 창의력을 찾는다는 것은 나무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오늘날의 인생을 걸어가는데 이와 같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낙오자가 되고 패배자가 된다는 엄숙한 사실은 어디에서나 잘 관찰됩니다.
 
▲ 모 전문지에 본 신년소감을 전재한 해인 1990년 문국진 교수와 북경 천단에서

넷째로는 도덕적(道德的)인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價値)판단력과 인간존중사상이 전제조건으로 됩니다. 또한 현대인으로서 건전한 시민의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언젠가 서울의 지하철파업이 생겼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무임승차의 기회가 있었는데 집계된 통계에 의하면 승객의 90%이상이 무임승차를 했다는 것입니다. 파리에서 같은 경우가 있었는데 불과 1% 정도였다고 듣고 있습니다. 무임승차 때문에 초래되는 피해는 결국 서울시민이 맡게 되는 것인데 이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과연 우리들이 선진국민의 대열에 낄 수 있겠는가를 말해줍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덕성의 상실이나 쇠퇴를 한탄합니다. 그럴 때마다 되묻고 싶은 점은 자기 자신의 도덕성은 어떠한가입니다.

이상에서와 같이 건강(健康), 자주(自主), 창의(創意), 도덕(道德)의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한 사람이야말로 바람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바람직한 사람이 되기는 힘든 일입니다.

나는 후학들에게 ‘여유 있는 사람’이 되라고 주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여유(餘裕)있는 사람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며 위에서 적은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한 사람 즉 바람직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여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사람’이란 바람직한 사람의 대명사와도 같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가끔 다음과 같은 귀중한 조언을 되새기게 됩니다.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되느냐”란 질문에 대하여 “물이 된다”고 답하였더니 좀 더 앞을 내다보고 “봄이 온다”고 하면 얼마나 여유가 있어 보이느냐하는 조언입니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답변은 과학적으로 나무랄 바 없는 정답이기는 하지만 ‘봄이 온다’고 하면 참으로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여유뿐만 아니라 낭만(浪漫)이나 정서(情緖)가 물씬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유 있는 사람은 급하게 굴지 않고 침착합니다. 지나치게 급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데서 시행착오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유가 없는 데서는 급하게 서둘게 되며 착오가 생기게 됩니다.

나는 간혹 외국인 학자들에게 교육의 목적이나 목표에 관하여 물을 때가 있습니다. 일본인 학자의 예를 든다면 첫째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둘째로 여유 있는 사람을 만드는데 목표를 둔다고 하더니 근래에 와서는 이 두 가지 외에 세계 속의 일본인이란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국력이 신장되었으니 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됩니다. 교육의 근본 목적에 관하여는 대동소이한 점이 있지만 그 나라의 입장을 반영시키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학생시절 이래 의사(醫師)이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수없이 주문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느 정도의 인간으로 발전했느냐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신 있는 답변이 나오지 않습니다. 경오년(庚午年) 새해 아침에 ‘사람’을 생각해보자는 나의 뜻은 결코 의례적인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뛰어넘어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다고 짐작되는 까닭에 그만큼 우리들에게는 여유 있는 인간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도약(跳躍)이 우연하게 이룩되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사회에서는 기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기적과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의지와 능력의 소산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는 우리들에게 가혹하리만큼 많은 숙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새해에는 차분하게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사람’을 알고 ‘자신(自身)을 알자’는 제언을 외쳐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화합과 단합은 위대한 힘을 만듭니다.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89년을 넘기고 이제 대망의 90년을 맞이하는 마당에서 다시 한 번 이 제언을 외쳐 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의료인(醫療人)들의 앞날에 영광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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