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大學) 졸업 후 30년 즉, 1977년 우리 동기생들은 각자의 수필과 가족사진(家族寫眞)을 내용으로 하는 ‘근인회(槿仁會) 30년(年)’이란 책자를 냈다. 다음 글은 이 책자에 실렸던 나의 수필이다.
전에는 청첩장이 있어서 주례를 섰던 횟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근래에는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에 따라 청첩장이 자취를 감추게 되어 횟수 계산이 엉성하게 되었다. 성의가 있으면 메모라도 해 둔다든지 해서 정확하게 횟수를 알아낼 길이 얼마쯤이라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나의 게으름도 어지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자성해보기도 한다.
어쨌든 이제까지 주례를 선 횟수가 이럭저럭 4백 번을 전후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30세를 약간 넘었을 때 처음으로 주례를 섰는데, 단에 올라서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졌던 일이 생각난다. 주례사(主禮辭)는 어떤 내용으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 주례 때의 신랑은 먼 친척이 되는 사람이었는데 식이 끝난 다음에 하객(賀客) 한 사람이 다가와서 왜 그렇게 흥분했느냐고 농조(弄調)로 하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주례의 대상으로는 제자들이 많다. 제자들의 경우에는 친밀감이 있는 까닭에 여유가 생겨서 좋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그렇지 않다. 어딘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제자들 중에서도 평소에 접촉이 있었던 사이라면 주례 서기가 훨씬 수월하다. 취미활동이나 운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제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마음껏 칭찬해주고 싶고 마음 속으로부터 축하해 주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우러난다.
지금은 미국에서 개업하고 있는 L군의 결혼식이 잊히지 않는다. L군은 학교 성적이 신통치 않고 한 해인가 유급까지도 한 일이 있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지간히 취미가 많은 처지여서 학생시절에도 잘 눈에 띄었다. L군에 대한 칭찬을 한참 늘어놓았더니 하객석에서 박수가 나왔다. L군이나 양친의 표정도 상당히 흐뭇해 보였다.
결혼식이 끝나자 양가의 부모님들과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신부(新婦)의 부친 되는 분의 말씀이 걸작이다. 신랑만 높이 칭찬하고 신부는 평범하게 넘어가다니 ‘언밸런스’가 아니냐는 항의(抗議)(?)다. 고이고이 기른 딸에 대한 부정(父情)을 이해할 만하다. 사위자랑을 들어서 기분이 나쁠 리가 만무하겠지만 역시 자기 딸 생각이 앞서는가 보다.
학원에 몸담고 있는 직업인지라 학생이나 졸업생들과 접촉하게 되는 기회가 적지 않다. 신랑감을 구해달라는 청탁이 어지간히 많다. 신붓감을 구해달라는 부탁도 있기는 했는데 전자의 경우가 훨씬 많다.
성공한 예가 거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졸업생들을 만나게 되면 기혼여부를 물을 때가 많다. 질문을 하다 보면 우스운 일이 생긴다. “○○년에 선생님께서 주례를 서 주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벌써 애가 둘입니다.” 무안한 느낌이 든다. 상대방에서는 이렇게 잊을 수가 있느냐고 분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월에 선생님께서 주례를 서 주셨는데요.” 이쯤 되면 죄책감(罪責感)을 느끼게 된다. 불과 수개월 전에 있었던 일,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니 한심하기보다 되먹지 못했다고 마음속에서 나무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상 주례를 맡아 본 대상자 중에서 확실하게 기억이 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평소에 친교가 있었거나 특수한 경우가 아닌 한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쪽에서는 실언(失言)을 했다고 가볍게 웃어넘기지만 상대편에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보일 때는 역시 괴로운 심정이 가득하게 된다.
이제는 어지간히 주례를 섰기 때문에 신랑 신부를 보면 알맞은 배필인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한 한 쌍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도저히 해서는 안 될 혼인을 하는구나 하고 염려가 되는 경우도 있다.
주례사를 하면서 신랑 신부의 표정을 살펴보면 재미있기도 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감개무량(感慨無量)한 표정으로 주례사를 경청하는 신랑이 있는가 하면 주례의 눈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신랑도 있다. 일반적으로 신부는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땀을 흘리거나 부들부들 떠는 사람도 있다. 이런 때에는 가엾은 기분마저 든다.
주례를 서고 나면 어쩐지 늙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닌 게 아니라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 같다. 여유가 생겼다는 말과 늙어간다는 말의 내용에는 다를 것이 없다. 주례를 서다 보면 대선배님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어느 노 선배님 왈(曰), “내가 주례를 서준 사람인데 이제는 저 사람이 주례를 서고 있으니” 대선배님의 독백에 대해서는 “대선배님 죄송합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답변을 올릴 따름이다.
그 후에도 주례를 맡을 기회는 계속 있어서 1000쌍은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중에는 도저히 잊히지 않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예를 두어 가지 소개한다. 그 하나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영애(令愛)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일이다. 한국교원대학교총장으로 취임한 후 2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교원대 상황보고 차 청와대로 오라는 분부를 받고 대통령집무실로 갔다. 보고가 끝난 후 영애인 효선(孝善)양의 결혼식이 있는데 주례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분부시다.
효선(孝善)양은 전(全) 전(前)대통령의 외동따님인데 내가 서울대학교총장 재직 시 우수한 성적으로 영문학과에 입학한 재원이었다. 당시 학력고사성적 300점이라면 어느 대학에 가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효선 양의 성적은 310점을 훨씬 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재학시절에 총장실에서 두어 번 만났는데 아주 예의 바르고 순진하며 재기(才氣)가 감도는 여학생이었다. 효선양은 그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도 훌륭한 성적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전문(傳聞)하고 있었다.
결혼식은 85년 6월 1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거행되었다. 대통령 내외분이 단하(壇下)에 자리 잡고 계신데 단상에서 주례를 보는 것이니, 이야말로 일생동안 한번 경험할까말까 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단하를 보니 삼부요인을 비롯한 귀빈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
식후 간단한 리셉션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주례로서 누구보다도 예우(禮遇)를 받았다. 주례의 권위(權威)를 새삼 맛본 셈이다. 신랑 윤상현(尹相賢) 군은 서울대에서 경제학(經濟學)을 전공한 사회과학도(社會科學徒)인데 두 사람은 불어학원에서 불어공부를 하던 중에 인연을 맺은 것으로 듣고 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Georgetown대학으로 가서 윤(尹)군은 정치외교학을, 전(全)양은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귀국할 때마다 나의 집으로 와서 단정하게 인사를 하곤 하였다. 명절 때는 빠지지 않고 예의를 지켰다.
또 하나는 보사부장관 재직 시 청년상공회의소(靑年商工會議所)가 주최한 합동결혼식의 주례를 맡은 일이다. 1988년 4월 10일 일요일 11시 30분에 88체육관에서 약 350쌍의 합동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데 약 40분이 걸렸으며, 입장 후 정렬한 신랑 신부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20대의 젊은 부부가 있는가 하면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쌍도 눈에 띈다. 차림새로 보아 넉넉지 못한 듯한 신랑 신부가 있는가 하면 귀공자와 같이 보이는 신랑도 있고 공주 같은 신부도 있었다. 어찌됐든 이제까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가 이번에 청년상공회의소의 주선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니 여러 가지 사연이 있을 법하다.
식후 사진 촬영이 있었는데 주례가 모든 부부와 함께 촬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고령자 부부와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신랑의 나이와 나의 나이가 같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65세의 신랑이었는데 그저 좋기만 한 모양이었다.
